121116 걸려 넘어지지 않는 기다림 – 마 11:2-11
우리는 오늘 대림절 3번째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자들로써,
신랑을 기다리는 정결한 신부의 모습으로써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데,
언제 오실 지 알 수도 없고, 알려주시지도 않습니다.
이런저런 흉흉한 일들이 벌어지고 말세인 것 같긴 한데 대체 주님이 언제 오실지 가늠할 수 조차 없습니다.
지치지 않고 기다려야 하지만 흔들리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내 경제적 상황이 좋고, 많은 것을 가지고 있고, 감정적으로도 힘들지 않으면 믿음도 흔들리지 않는 것 같지만,
막상 내가 힘들어질 때면 믿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흔들리지는 않습니까?
반대도 이야기해 볼 수 있겠지요.
힘들 때는 기도하고 봉사하고 하면서 내 믿음이 커 가는 것 같지만, 정작 잘 살게 되었을 때는 신앙을 소홀히 여기게 되는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절망은 하지 마십시오.
세례 요한도 그랬습니다.
우리가 저번 주에 보았던 것은 아무도 없는 광야에 나가서, 낙타털 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만 먹으면서도 지도자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일갈을 날리던 세례 요한의 당찬 모습이었습니다.
또 세례요한이 말하길, 자신은 물로 회개의 세례를 주지만, 자신의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로 주시는 능력 많으신 분이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보니까 세례요한이 제자들을 보내서 예수께 묻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그 당당하던 요한이 왜 이렇게 불확실한 모습을 보이고 있을까요?
다시 3장을 돌아가보면, 예수를 소개하던 요한은 예수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예수의 세례 후 성경은 자연스럽게 예수의 이야기로 넘어가면서 세례요한은 사라지는 듯 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다시 세례요한이 오늘 본문에서 등장하는데 그는 지금 어디에 있다고 합니까?
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가 왜 옥에 갇혀 있는지는 마태복음 14장과 마가복음 6장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
당시 갈릴리 지역을 다스리던 왕은 헤롯이었는데, 그는 자기 동생의 아내를 빼앗아 결혼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 부도덕함을 강하게 비판했고요.
지금 민주사회에서도 통치자의 잘못을 비판하면 도리어 비판을 받기 십상인데, 그 당시에는 오죽했겠습니까?
헤롯은 눈엣가시 같던 세례 요한을 결국 옥에 잡아 가둡니다.
한편,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사람들이 참 선지자라며 세례 요한을 따르자 불안한 나머지 옥에 가두었다고도 합니다.[1]
어쨌든 요한은 지금 옥에 갇혀 있고, 그는 더 이상 누구에게도 강력한 회개의 메시지를 전파할 수 없게 됩니다.
성경은 그의 심리 상태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습니다만, 그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았을 때, 앞에서 말씀 드린 흔들리는 믿음의 상태가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옥에 갇혀서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고 보니까,
자신이 예수를 분명 능력 많으신 분이고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는 분이라고 소개하고 선포했는데 저 분이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단 말이죠.
무엇인가 큰 일을 일으키실 것만 같았는데 너무 잠잠한 것 같아요.
조금 더 상상력을 가미하자면, 세례 요한 역시 후에 제자들이나 백성들이 그랬던 것처럼 예수를 어떤 정치적인 해방을 가져올 메시아로 생각했을지도 모르죠.
그래서 예수가 정치적인 행동을 취하여 자신을 옥에서 구해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있었으리라 생각해 봅니다.
세례요한은 지금 이렇게 흔들리고 있어요
‘당신이 메시야 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을 또 기다려야 합니까?’
그 때 예수께서 자신을 찾아온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먼저 4-5절을 읽어보실까요?
이 말씀은 예수께서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이사야 61:1-2을 인용하셨던 것으로 누가복음 4:18-19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각 구절 간 복음을 듣는 대상이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습니다만, 그들을 자유케 하고 치유하고 복음을 전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예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대로, 그리고 자신이 선포한대로, 그렇게 사역하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다시 말해,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너희가 듣고 본 것을 말하라는 의미는 예수 자신이 성경에서 예언되었던 메시야요, 요한이 광야에서 길을 준비하던 자임을 전하라는 말입니다.
‘백문불여일견’ 이라고 직접 듣고 보았으니 요한의 제자들에게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그런데 그 때 예수께서 한 마디 덧붙이십니다.
6절을 같이 읽어볼까요?
여기에서 실족하다의 원어는 σκανδαλίζω /skandalizo/ 입니다.
영어의 무엇과 비슷합니까?
영어 단어 scandal의 어원이 바로 이 단어에 있습니다.
우리 흔히 ‘스캔들이 터졌다’고 합니다.
즉, 유명인의 부도덕하거나 불명예스러운 사건이 밝혀졌을 때 스캔들이 터졌다, 혹은 스캔들에 연루되었다고 말합니다.
즉, 어떤 큰 잘못을 이르는 말로 쓰입니다.
그럼 오늘 본문에서 나(예수)로 말미암아 잘못하지 않으면 복이 있다는 말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마치 예수께서 잘못을 부추기거나 넘어지게 하는 사람인 것처럼 보이는 문장 아닙니까?
아닌 게 아니라,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합니다.
사 8:14-15 “그가 성소가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걸림돌과 걸려 넘어지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주민에게는 함정과 올무가 되시리니
많은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걸려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덫에 걸려 잡힐 것이니라”
사도바울도 로마서에서 이사야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를 부딪칠 돌, 걸림돌, 거치는 바위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롬 9:32-33”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예수를 가리켜 시험돌이니, 거침돌이니, 부딪칠 돌이니 하는 말이 대체 무엇일까요?
마 13:57절 보면, 예수의 고향 사람들, 친척들이 예수를 쫓아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를 배척한지라…”
여기에서 배척한다는 단어가 이 σκανδαλίζω /skandalizo/ 입니다.
또 마 26:31에서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 후 잡히실 것을 직감하시고 제자들에게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고 예언하셨는데, 이 때 예수를 버린다는 말의 원어가 바로 실족할 것이다, σκανδαλίζω /skandalizo/ 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라는 말의 뜻은 ‘예수를 의심하거나, 그의 말씀을 지키기 어려워하여 시험에 들거나, 배척하거나 버리지 아니하면’ 이라는 뜻입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 같지만 옥에 갇혀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세례 요한에게 이 말은 어떻게 와 닿았을까요?
요즘 말로 풀어보면 이럴 것 같아요.
‘요한이여,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대가 선포했던 것처럼, 그대가 준비했던 것처럼 나는 그렇게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나에 대한 믿음이 절대 흔들리지 않고 나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붙들어야 당신에게 구원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이사야 선지자의 다음 말을 기억했더라면, 예수의 이 말씀은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사 28:16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촛돌이라 그것을 믿는 이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
그렇게 요한의 제자들이 돌아간 후에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요한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말씀해 주십니다.
9-10절을 한 번 읽어볼까요?
비록 저렇게 옥에 갇히고 믿음도 흔들리는 것 같지만 저 사람이야 말로 성경에 예언되었던 인물이고 제 역할을 충분히 감당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죽하면 11절처럼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없다고 말씀하셨을까요?
그런데 그 11절 말미에 반전이 숨어 있습니다.
11절을 같이 읽어볼까요?
반전은 무엇입니까?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세례 요한보다 크다는 겁니다.
이는 곧, 이 땅에서 크고 작고의 기준이 천국에서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관주 성경의 해설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그리함으로써 천국 즉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에 속하는 사람은, 그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그는 여자가 낳은 자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더 위대하다.”[2]
그렇다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고, 새로운 창조에 속하는 사람들은 누구겠습니까?
6절에서 보았던 예수 때문에 실족하지 않는 사람들.
구원의 문은 누구에게나 넓게 열려 있으나, 오히려 예수를 따라 그 좁은 길을 가는 사람은, 그래서 끝내 구원을 이루는 사람은 아무나가 아니라는 겁니다.
다음 말씀을 같이 한 번 읽어보시겠습니까?
고전 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여기에 쓰인 유대인이 거리낀다는 말 역시 σκανδαλίζω /skandalizo/ 입니다.
하나님의 선택 받은 백성이었던 유대인들이었지만 그들에게 예수는 거리끼는 것이었어요.
아주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어요.
그래서 십자가에 매달아 죽여버린 것 아닙니까?
그들은 예수로 말미암아 실족한 사람들인 거에요.
그들에게 복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서 큰 자가 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이 세상 후의 세상인 천국에서 주와 함께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큰 자가 되려고 발버둥 치다가는 오히려 예수의 말씀 때문에 시험에 들지도 모릅니다.
세상의 명예와 권세, 그리고 돈을 얻으려면 예수의 말씀이 거추장스럽거든요.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이 어떻게 예수를, 그리고 그의 명령을 따라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예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않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길 바랍니다.
조급해하지 않고 다급해하지 않고 인내로 예수를 기다리며 믿음을 지키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실족하지 않고 믿음을 지킨 자에게 우리 주께서 주시는 천국의 위로와 소망이 함께 할 줄 믿습니다.
[1] https://ko.wikipedia.org/wiki/헤로데_안티파스#cite_note-6
[2] 성경전서(관주 해설)(Nkgo88ti)(개역개정판), (대한성서공회, 2009), 마 1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