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916 예수 앞에 다시 – 눅 17:11-19
올해 6월 20일 전라남도 고흥군 소록도에 위치한 국립소록도병원 소회의실에서 특별재판이 열렸습니다.
그것은 과거 병원 측에서 소록도에 집단 거주하는 한센인들에게 단종, 즉 강제 정관수술 및 낙태를 강요, 시행했는지 조사하기 위해서 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달인 7월 30일 SBS 그것이 알고 싶다 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역시 소록도에서의 강제 낙태/정관 시술이 이루어졌는지 조명되었습니다.
1900년대 초 소록도에 지어진 이 병원에서는 일제 강점기, 군사정권, 그리고 문민정부가 들어서기 전인 199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이런 비인격적인 대우가 있었다고 합니다.
연구에 의해, 에이즈처럼 자녀가 그 병을 갖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2세를 낳지 못하게 했습니다.
짐승만도 못한 대우를 했던 것은 오히려 이 병이 주는 무서움, 그리고 그 공포 때문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정확한 의료지식이 없을 때는 그럴 법도 했을 겁니다.
전염병인데다가 이 병에 걸리면 피부가 일그러지고 손과 발이 조금씩 잘려나가는데 이게 어디 예삿일입니까?
그래서 이 한센병 환자들을 비하해서 문둥이라고도 하지 않았습니까?
이 한센병에 관해서는 성경에서도 아주 잘 나타나 있습니다.
병의 특징이나 병을 이르는 단어의 어원이 다르다 하여 지금의 한센병과 성경의 나병이 다르다고 말하는 주장도 여럿 있습니다만,[1]
일단 성경의 번역대로 나병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겠습니다.
구약성경 레위기 13-14장에 보시면 이 나병에 대한 아주 구체적인 설명들이 나오는데요, 사람의 몸은 물론, 옷감이나 벽에도 붉은 점이 생기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나병에 걸리면 부정하게 되었습니다.
피부에 병이 발하면 제사장에게 가서 진단을 받습니다.
그리고 나병이라고 진단이 되면 부정한 자가 되어 다른 이들로부터 격리, 혹은 분리되었어야 합니다.
레위기 13:45-46의 말씀입니다.
“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
성경에서 옷을 찢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이나 분노 혹은 심각한 죄를 깨달았을 때 하는 행위입니다.
나병환자가 옷을 찢고 부정하다 외치는 것은 결국, 자신의 병이 큰 죄로 인함이요,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지 못하다는 것을 말해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공동체 밖에서 살란 말은 곧 추방, 심하게 말하면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오늘 이야기를 보면 이런 나병환자 몇 명이 나옵니까?
열명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추방된 채 어울려 살던 열명의 나병환자가 지금 누구를 보고 소리치고 있습니까?
예수를 보았습니다.
비록 병자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는 규제 때문에 멀리 서서 그저 소리를 높여 예수를 부를 뿐이었지만, 이것은 단순히 ‘한 푼 줍쇼’하는 동냥의 차원이 아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2]
그들이 예수를 부를 때, “예수 선생님이여” 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이는 곧 이미 그들이 예수에 대해서 들었단 의미이고, 예수께서 해 오신 일들 역시 알고 있다는 의미이며, 그 예수가 자신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을 충분히 기대하고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들이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달라는 말은 곧 무슨 뜻이겠습니까?
다른 무엇도 아닌 자신들의 병을 고쳐 달라는 말 아니겠습니까?
예수께서 그들의 간청하는 목소리를 들으셨어요.
그리고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꿰뚫어 보셨어요.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14.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자, 우리 방금 이야기 나눈 바로는 이 나병환자들이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는 것은 병이 낫게 해 달라는 것이고, 예수께서도 이것을 아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했을까요?
그것은 아까 레위기에서 이야기했던 나병환자에게 대한 규례를 살펴보면 답이 나옵니다.
나병환자라고 진단하는 것이 제사장인데,
나병에서 나았다고 진단하는 것 역시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이 나병에 걸렸던 사람을 보고 다 나았다고 선언하면, 그는 곧 자기 옷을 깨끗이 빨아 입고 정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이 열명의 나병환자들에게 제사장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이라는 말씀은 곧, 그들의 병이 나았다는 말이 됩니다.
아니라 다를까, 14절 이어지는 말씀에 보면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았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원어의 문맥을 살펴보면, 그들이 예수의 곁을 떠나자 마자 병이 나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단, 저는 여기에서 이 나병환자들의 믿음이 참 대단하다고 느꼈습니다.
이 사람들이 어떻게 이 병에 걸리게 되었고 얼마나 이 병을 앓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중한 병일수록, 투병기간이 길수록 사람이 무기력해지고 의욕도 잃어버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들은 제사장에게 가라는 예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발걸음을 옮겼어요.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말이죠.
자신들의 처지가 어떻든 자신들이 선생이라고 부른 자가 말한 그대로 실천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들의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었어요.
아까 구약 말씀에서 읽었던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가 기억나십니까?
이 사람은 이렇게 즉각 순종하지 못했어요.
요단강에서 일곱번 씻으면 낫는다고 말해줘도 자존심 상한다고, 기분 나쁘다고 화 내면서 돌아가려고 했거든요.
결국은 그렇게 일곱 번 씻고 나병에서 고침 받았습니다만, 이런 나아만과 비교해 보았을 때도, 예수의 말에 즉각 반응한 이 열명의 나병환자들의 믿음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깨닫게 됩니다.
이런 믿음의 순종과 병 고침이 참 대단합니다만...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이제부터가 진짜입니다.
그 열 명이 다 병에서 나았어요.
그 끔찍한 악몽에서 해방되었어요.
규례대로 제사장의 선언만 있으면 그들은 자유가 되요.
그런데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알고 걸음을 멈췄어요.
다른 사람들은 어디 갔는지 알 수 없지만, 이 사람은 멈췄어요.
그리고 돌아서서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시작합니다.
전에는 자신을 고쳐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면, 지금은 자신을 고쳐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그렇게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려 감사를 표합니다.
즉, 이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를 통해서 자신에게 임했고 자신이 그렇게 병에서 나았음을 즉각 깨달았다는 거죠.[3]
이 사람의 행동을 정리해 보자면,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면서 예수에게 되 돌아와 그 발 아래 엎드려 감사를 표했어요.
이 사람은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 무슨 말을 했을까요?
만약 제가 이 사람이라면 ‘감사합니다’를 연발하면서 흐느껴 울었을 것 같아요.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인간 취급도 못 받고, 옷을 찢으며 부정한 자라, 저주받은 자라 스스로 외쳐야 했고,
가족으로부터, 공동체로부터 추방되어 죽음보다 못한 삶을 살게 했던 병을 치료해 주었는데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냔 말이죠.
이렇게 그 발 아래 엎드려 감사를 표하는 사람에게 예수께서 물으시죠.
‘열 사람이 다 병에서 나았는데 나머지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렇게 물으실 때 저는 정말 아찔했습니다.
왜냐고요?
마치 저에게 이렇게 물으시는 것만 같았거든요.
내가 너에게 아름다운 인생을 살도록 기회를 주었는데 너는 왜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 차 있니? 너의 감사는 어디 있니?
네가 먹고 입고 자는 것에 부족함 없도록 채워줬는데 너는 아직도 왜 더 채워달라고만 하니? 너의 감사는 어디 있니?
탐욕과 정욕에 물든 너를 구원하려고 내가 십자가를 지고 대신 죽어줬는데 너는 왜 아직도 죄의 자리로 돌아가려고 하니? 십자가에 은혜에 대한 너의 감사는 어디 있니?
내가 어렵고 내가 궁할 때는 막 소리를 지르면서 매달려요.
제발 한 번만 살려달라고 떼를 써요.
그리고 막 다급하고 갈급하니까 하라는 대로 다 해요.
그래서 문제가 해결되고 복을 받았는데 그 다음 행동이 없다는 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또한, 성경은 예수께 다시 돌아온 이 사람을 사마리아인이라고 밝힙니다.
유대인들은 이 사마리아인들을 개보다 못하다고 여겼어요.
이방인의 피가 섞였다 하여 자신들의 공동체 안에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했어요.
당연히 자신들이 드리는 예배에 참여시키지 않았어요.
자연스레 유대인들 보기에 사마리아인들은 율법과 규례를 어기고 무시하는 야만인들이었어요.
하지만 예수님 말씀하시잖아요.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온 자가 없느냐?”
아무리 교회 오래 다녔다고 해도
아무리 신앙 좋은 척 해도
이방인이라 여기는, 즉 신앙이 없다 하는 자보다 더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영광 돌리지도 않는 것이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그럼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아무리 내 생각에는 복된 길이고 훌륭한 길이라고 해도
그 가던 길을 멈춰 서서
그 길을 인도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그 분을 향해 큰 소리로 영광을 돌리면서
결국 그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십자가 다리를 놓아주신 예수님께 엎드려 감사를 표하는 겁니다.
언제요?
매일매일.
매 순간순간.
지난 주에도 말씀 드렸지만, 우리는 연약한 인생이고 무익한 종일 뿐이에요.
주께서 가라 하시면 가는 것이고 멈추라 하시면 멈추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아무리 강하고 부한 것 같아도 주께서 낮추시면 한 없이 낮아지고 작아지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런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이 또한 우리 주님이십니다.
내 인생을 나의 것이라고 착각하지 마세요.
예수 믿는 순간 우리의 인생은 예수의 것이지 않습니까?
매일매일 매순간순간
우리 삶의 시작은 우리 삶의 주인이시요 인도자이신 주님을 기억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께 영광 돌리고 감사하는 것에 우리 삶의 초점이 맞춰져 있어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졌다고 해서 그 길로 쌩 달려갈 것이 아니라
그런 나를 통해 영광 받기 원하시는 우리 주님을 바라 보길 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신 적은 언제 입니까?
예수의 십자가 앞에 서 여러분의 모든 감사를 올려드린 때는 언제입니까?
바로 지금, 다시! 예수 앞에 엎드립시다.
영광 돌리며 감사합시다.
그것이 지금 우리의 할 일입니다.
[1] “… it is certain that they were not modern leprosy (Hansen’s disease), which did not exist in the ancient Near East.” David P. Wright, “Leprosy,” ed. Mark Allan Powell, The HarperCollins Bible Dictionary (Revised and Updated) (New York: HarperCollins, 2011), 548.
[2] John D. Barry et al., Faithlife Study Bible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12, 2016), Lk 17:13.
[3] Biblical Studies Press, The NET Bible First Edition Notes (Biblical Studies Press, 2006), Lk 1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