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2516 “부자는 왜?” 눅 16:19-31
어렸을 때 성경학교에서 종종 인형극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이야 아이들이 문화적 혜택을 여기 저기에서 많이 누리고 스마트폰 등 흥미를 불러 일으키는 것들이 잔뜩 있지만
저 어렸을 때까지만 해도 인형극 한다 그러면 동네 아이들이 참 많이 모였거든요.
그 인형극 중 하나가 바로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각색해서 보여주었던 극이었어요.
화려한 옷의 부자와 누더기 옷을 입은 나사로의 모습을 얼마나 재미있게 표현했는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렇게 인형극을 재미있게 보고 난 다음에 느낀 감정은 ‘무섭다’ 이었어요.
‘부자가 가게 된 지옥이 참 무섭구나’ 라고 말이죠.
인형극을 맺으면서 선생님들이 내린 결론은 지옥은 반드시 있고 그 지옥은 참 무서운 곳이기에 그곳에 안 가려면 예수님을 잘 믿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보니까 이런 결론은 이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를 너무 빨리, 그리고 얕게 결론 내린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네! 맞습니다.
천국과 지옥은 반드시 있습니다.
예수 잘 믿으면 천국이요, 그렇지 않으면 지옥입니다.
하지만 그 인형극에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 잘 믿는 것이고, 무엇을 잘못했기에 지옥에 가게 되는지를 이야기해 주지 않았거든요.
잘 알려진 반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오늘의 이야기를
저와 함께 살펴보시겠습니까?
이야기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 두 사람의 모습을 아주 대조적으로 묘사하면서 시작합니다.
우선, 부자의 모습입니다.
19절에서 부자의 모습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습니까?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었다고 말합니다.
자색 옷의 자색은 귀족이나 상류계층을 나타내고 이런 옷은 너무 비싸서 그들만 입을 수 있는 옷이었다고 합니다.[1]
고운 베옷은 질 좋은 이집트 면직물로 만든 속옷이라고 합니다.[2]
그래서 어떤 학자는 이 모습을 가리켜 이 부자는 마치 자기가 돈이 많은 것과 최신 유행의 옷을 입은 것을 자랑하고 싶어 환장한 사람과 같다고 표현했습니다.[3]
그리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겼다고 표현합니다.
날마다 잔치를 열고 즐길 수 있었다는 것은 일을 하지 않았다는 얘기이고
그렇게 일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부자였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반면, 나사로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20절에 보시면, 거지라 하는데 헌데까지 앓고 있습니다.
이 헌데는 피부병 혹은 종기를 가리키는데요, 벌겋게 물집이 차오르거나 터져서 피나 진물이 흐르기도 합니다.
매우 가렵고 고통스러운데 그 원인이 워낙 다양해서 치료도 쉽지 않다고 합니다.
이렇게 병으로 고통 받는 그는 지금 부자의 대문에 버려져 있습니다.
그렇게 병들고 일할 힘도 없어 남들이 데려다 준 곳에서 구걸을 하고 있습니다.[4]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고자 했지만 그마저도 변변치 않습니다.
“배 불리려 하매…” 결국 먹지 못했다는 이야기거든요.
거지의 헌데를 핥는 개들이 그 음식을 다 집어 먹었기 때문일 것입니다.[5]
나사로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뜻을 갖습니다만,
20-21절에서의 그의 모습은 오히려 “하나님이 도우시지 않는” 모습으로 비칠 뿐입니다.[6]
그런데 한 순간 이 둘의 대조적인 삶이 극적으로 뒤바뀝니다.
바로 이들이 죽는 그 순간에 말입니다.
죽는 순간 부자가 누리던 부가 끝이 납니다.
죽는 순간 거지 나사로를 괴롭히던 모든 고통도 끝이 납니다.
완전 초기화가 된 셈입니다.
그리고 진짜는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거지는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고 말하지만 부자는 그저 죽어 장사되었다고 말합니다.
벌써 어감의 차이가 느껴지십니까?
땅에 묻혔다는 부자의 모습은 곧 지옥의 모습으로 연결됩니다.
23절을 같이 읽어보실까요?
그렇게 자신의 부를 자랑하며 즐기던 부자는 음부, 즉 지옥에서 고통을 받고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서 안식합니다.
음부에서 고통 받는 부자가 뭐라고 합니까?
제발 나사로의 손 끝에 물 한 방울이라도 묻혀서 자신의 혀를 서늘하게 해 달라고 합니다.
한 학자는 이 장면에서 부자가 나사로의 이름을 언급한 것은 그를 알고 있었다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도와주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지적합니다.[7]
이런 부자의 간청에 아브라함이 뭐라고 합니까?
25절을 함께 읽어보시겠습니다.
한 마디로 그럴 수 없다는 겁니다.
생전에 거들떠 보지도 않던 나사로를 시켜서 자신을 구원해 달라는 부자의 말에 아브라함이 일침을 놓은 것이지요.
지금 읽으신 25절 말씀은 사실 눅 6장에 드러나 있습니다.
눅 6:24-25절을 함께 읽어보실까요?
이 누가복음 6:20-26은 마태복음의 산상수훈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복에 관한 말씀, 평지설교의 일부인데요,
세상에서 말하는 복과는 전혀 다른 복을 이야기함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야기 속의 아브라함의 말, 그리고 방금 읽으신 이 말씀에서 우리는 누가복음을 관통하는 재물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내가 가진 것으로 내가 뽐내고 내가 잘 먹고 잘 살겠다는데 그게 그렇게 큰 죄인가요?’ 라고 물으신다면,
오늘 이 말씀들을 보시면 됩니다.
그게 그렇게 죄입니까?
네! 죄입니다.
단순히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가졌다고,
혹은 내가 조금 삶의 여유를 가지고 즐겼다고 죄가 아니라,
그렇게 하는 사이에,
내가 가진 재물로 내 삶을 즐기는 동안
내 주위의 죽어가는 저 가난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병들어 헐벗고 죽어가는 사람들 돌아보지 않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거에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우리는 지난 주 불의한 청지기 비유를 통해서 성경이 말하는 재물관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그러면서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지난 주에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재물이 우리의 안식처가 될 수 없습니다.
손에 다 쥔 것 같아도 금방 없어지는 것이 재물이니까요.
오늘 이 부자를 보십시오.
그렇게 휘양찬란한 삶을 살았어도 죽으니까 빈 손으로 땅에 묻히지 않습니까?
또한, 재물이 우리의 신뢰의 대상도 될 수 없는 이유는 그 재물 또한 온 우주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요,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 25절에서 아브라함의 말, 즉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에는 수동태 동사가 쓰였습니다.[8]
다시 말해, 이 부자가 태어날 때부터 이런 부를 자신의 힘으로 벌어들인 것이 아니오,
그저 자기 손에 쥐어진 거에요.
그런 재물을 누릴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어졌던 선물이에요.
다시 말해, 원래 내 것이 아니었고 지금도 내 것이 아닌 재물을 가지고 내가 즐기고 자랑하려고 욕심을 부린다면 그것은 곧 죄가 된다는 얘기입니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보면,
자신의 처지가 나아지지 않을 것을 깨닫게 된 부자가 그제서야 자신의 형제들을 걱정하기 시작합니다.
‘나한테 나사로를 보내주지 않을 거면 내 형제들에게라도 보내주세요. 죽었다 살아났다면 믿을 것 아닙니까?’
자신의 처치를 한탄하면서도 간절하게 호소하는 부자에게 아브라함은 다시 한 번 강경한 입장을 취합니다.
29-31절을 읽어보실까요?
여러분, 생각해 보시지요.
24절에 보시면 이 부자는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불렀거든요.
유대인이에요.
율법과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모를 리 없었어요.
하지만 그가 과연 하나님의 법을 따라 의를 행하고 이웃을 사랑했습니까?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삶을 살지 않았습니까?
나머지 형제들이라고 달랐을까요?
아버지의 집에 산다고 하고 나사로를 보내서 돌이키게 해달라고 하는 모습에서 부자의 나머지 형제들도 이 부자 못지 않게 방탕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렇기에 죽은 자가 살아 돌아오는 정도는 되어야 내 형제들이 돌아올 것이라고 부자는 생각했겠지요.
하지만 아브라함은 냉정하게 그마저도 소용없다고 선을 그어버립니다.
그리고 31절을 보면 누구를 생각할 수 있을까요?
죽었다 살아났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외면하는 그.
바로 예수님의 모습 아닙니까?[9]
시대의 기적을 요구하는 유대인들에게, ‘너희에게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 라고 하시면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다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의 제자들을 잡아 죽이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요즘이라고 다를까요?
예수와 동시대에 살았던 사람들도 예수를 직접 보고도 믿지 못했는데,
하물며 예수를 보지 못하는 이 시대 사람들은 어찌 할까요?
그렇게 죽었다 살아난 이가 우리에게 그 분의 뜻을 알려주고 계시고 말씀하고 계시지만,
율법과 선지자들을 무시하던 우리의 옛 사람의 모습처럼
우리 역시 주의 뜻을 무시한 채 우리만을 위해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한편으로 이 무서운, 그리고 부담스러운 말씀 속에 숨어있는 주의 위로를 여러분이 발견하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참 힘들고 고통스럽고 어렵고 수치스럽고 죽음보다 더 괴로운 인생을 산 이 나사로가 죽음 후에는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이 참 괴롭고 힘들다 하더라도,
그 어려운 삶 가운데에서도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분을 뜻을 쫓아 살기로 애쓰셨다면,
여러분에게는 반드시 하늘의 위로가 있습니다.
반대로 남들보다 여유로운 삶을 산다고 해도 그 돈과 재물을 나의 것으로 혹은 내가 신뢰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가난한 자에게 흘려 보낼 수 있다면 이 역시 주께서 후에 하늘의 상급으로 갚아주실 줄 믿습니다.
아까 읽었던 눅 6장 말씀에서 부자들을 향한 경고가 있기 전에 가난한 자들을 향한 위로가 먼저 있습니다.
결국, 예수의 말씀이 경고가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소망이 되기도 합니다.
눅 6:20-23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하나님 나라에 속한 여러분,
주의 제자로 부름 받은 여러분,
가난하고 고통 중에 있다고 울상만 하지 마시고,
반대로 여유 있다고 자만하지 마시고,
오직 가난한 심령으로 내 주위를 돌아보아
함께 주의 구원을 사모하며
역시 함께 주의 말씀 따르기로 결단하는 여러분 되시길 간절히 소망니다.
[1] 윤철원, 누가복음, ed. 성결교회 성서연구원, 서울신학대학교 개교 100주년 기념 성서주석 (부천: 서울신학대학교 출판부, 2014), 440.
[2] 케네스 E. 베일리, 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 고대 중동의 삶, 역사, 문화를 통해 본 복음서 trans., 박규태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6), 595.
[3] Ibid.
[4] Ibid., 597.
[5] Ibid., 597-8.
[6] Ibid., 596; 성경전서(관주 해설)(Nkgo88ti)(개역개정판) (대한성서공회, 2009), 누가복음 16:20-1.
[7] 윤철원, 442.
[8] 베일리, 609.
[9] 윤철원, 4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