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2116 규례와 긍휼 사이 – 눅 13:10-17
우리의 여름을 뜨겁게 달궜던 올림픽이 끝나 갑니다.
최선을 다해 경기에 임했던 모든 선수들에게 뜨거운 격려와 응원을 보냅니다.
다들 열심히 했습니다만 우리 나라 선수단 중 유독 아쉬운 모습을 보여준 선수가 있다면, 박태환 선수가 아닐까 합니다.
2014 아시안 게임 이후 어찌 되었든 금지 약물에 대한 양성 반응이 나왔고 그로 인해 징계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 대한수영연맹에서의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규제로 인해 국가대표 선출이 늦어졌고 결국 충분한 훈련의 기회를 놓쳤다고 합니다.
결국 올림픽 경기에서 어느 종목 하나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였고 마지막 1,500m 경기는 결국 기권하고 말았습니다.
참고로, 중국의 쑨양 선수 역시 금지 약물 사용 문제가 있었습니다만 자국의 보호로 스캔들을 딛고 일어섰고 급기야 이번 올림픽에서 아시아인 최초로 200 m자유형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선수가 최고의 기량으로 경기에 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협회의 책임 일 텐데 오히려 그 협회가 선수 하나를 우습게 만들었다는 비난이 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박태환 선수에 대한 많은 규제가 정말 최선의 선택이었을까요?
아니면 긍휼을 베풀어서 올림픽을 잘 준비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최선이었을까요?
전기세 누진세에 관한 것도 규제 때문에 불편을 끼치는 것 중의 한 예가 되겠지요.
이 규제나 규칙, 법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유대법에 대해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겠죠.
유대법을 ‘할라카’라고도 하는데요, 성경법 (613 계명)과 탈무드, 랍비법, 관습과 전통을 포함한 유대교의 종교법을 말합니다.[1]
이 중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39개의 조항이 있는데 이것을 ‘멜라코트’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는 많은 활동을 제한하고 있는데요, 심지어는 촛불의 불을 끈다든지, 꽃에 물을 주는 것마저도 일을 하는 것으로 보고 금지했습니다.[2]
유대인들은 멜라코트에서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열심히 일하고 7일째는 쉬라는 그 명령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되 더 확대 해석을 하여 많은 활동에 제한을 두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일은 큰 노동에 속했습니다.
본문 앞 누가복음 6장에서도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께서 손이 마른 사람을 안식일에 고치나 안 고치나 시험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우리 주께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치료하셨지만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한 병자가 등장하는데, 어떤 사람입니까?
18년 동안 허리가 굽어서 조금도 펴지 못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나이 들어서 허리 굽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펼 수도 없게 굽었다는 거에요.
왜 이렇게 굽었나 했더니 그것이 바로 귀신에 들려서 그렇게 되었다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마침 이 여인은 회당에 있었고 그 회당에서의 예배를 예수께서 주관하고 계셨어요.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시던 예수께서는 이 여인을 주목해 보셨어요.
태어날 때부터 등이 굽었던 것이 아니고 악한 마귀가 이 여인을 병들게 한 것을 보셨어요.
누가복음 4장을 잠깐 보면요
예수께서 자신의 사역 시작을 공표하시면서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읽어주시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눅 4:18-19, 개역개정)
예수 자신이 왜 이 땅에 오셨고 무슨 사역을 하실지 정확히 표현하신 것인데요,
눌린 자를 자유케 하신다는 그 분이 이 여인을 가만 두셨겠습니까?
여인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십니다.
영어/, “Woman you are freed from your disability” 입니다 (ESV).
한국어 성경에서는 병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가 영어로는 disability 장애 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이 단어의 그리스 원어로는 ἀσθενείας / astheneias[3] 입니다.
같이 읽어보실까요?
다른 본문에서 이 단어가 쓰일 때는 단순히 병 혹은 연약함 정도로 번역이 되었습니다만,
오늘 본문에서, 특히 영어 번역에서 disability 즉, 장애라고 표현했습니다.
등이 굽어서 조금도 필 수 없는 정도였으니까요 장애라고 표현한 영어 번역이 아주 정확했다고 말할 수 있겠죠.
그리고 ‘놓였다’ 라고 말씀하신 단어도 살펴볼 텐데요,
이 놓였다는 단어의 원어는 ἀπολέλυσαι / apolelysai[4] 입니다.
이 단어가 가진 뜻이 굉장히 많은데요,
이혼하다, 보내다, 출발하다, 해산하다, 놔주다, 가게 하다, 그리고 용서하다 라는 뜻도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뜻을 가졌는데 분명한 것은 이 단어가 무엇으로부터 명확하게 분리되는 것을 말한다는 것이지요.
즉, 성경기자가 이 단어를 통해 이 여인이 그녀의 병으로부터 정말 완전히 놓임 받았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께서 그저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고 그 여인에게 다가오셔서 안수하셨습니다.
한글 번역에는 드러나지 않습니다만 영어 성경을 보니까 hands 즉 두 손을 얹으셨다고 말하고 있더라고요.
여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양 손으로 안수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상상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렇게 안수하시자마자 이 여인의 허리가 거짓말처럼 펴지고 이 여인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아까 서두에서 지나친 규례에 대해 말씀 드렸는데요 지금 바로 그 상황이 벌어진 거예요.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회당장이 소위 태클을 겁니다.
성경에서는 ‘분을 내었다’고 말합니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쳤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 쉬어야 할 날에 병을 고침으로써 법을 어겼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일할 날이 엿새나 있는데 그 때 고칠 것이지 왜 안식일에 고쳤냐고 합니다.
이 회당장은 회당의 예배를 주관하는 사람이었는데요,
어쩌면 예수께서 병을 고치는 바람에 안식일 예배의 흐름이 끊기고 예배를 그르쳤다고 화를 내는 것이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 때 예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15-16절을 같이 읽어보실까요?
아무리 노동을 금지하는 안식일이라도 가축들에게 물은 주지 않냐 하십니다.
즉, 아무리 말 못하는 짐승이라도 그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물을 주면서
아브라함의 딸, 즉 동족이 여기에 짐승보다 못한 모습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는데 그걸 고쳐줬다고 따지냐 이거에요.
그 회당장의 모습을 보고 주께서는 외식한다고 꾸짖으십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시지요.
이 여인보고 아브라함의 딸이라 하셨으니 유대인이에요.
유대인인 그녀는 아마 귀신에 들려 병이 생기자 마자 이 곳 회당을 찾았을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병이 나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을 테니까요.
하지만 회당은 남성중심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오히려 이 여인은 그저 외면 받았을 것입니다.
일할 수 있는 엿새 동안 와서 병 고침을 받으라고요?
그런데 이 여인의 병든 연수가 몇 년이라고 했습니까?
자그마치 18년이에요.
18년 동안 회당을 찾았는데 귀신을 내어쫓고 병을 고쳐준 사람이 있었습니까?
안식일 아닌 날 와서 병 고침 받으면 된다고요?
그럼 안식일이 오기 전 진작 고쳐줬음 될 일 아닙니까?
18년 동안 있었다고요.
허리가 굽은 채로요.
그냥 고쳐주기 싫은 것 아니었을까요?
아니, 못 고쳤겠지요.
그러다가 예수께서 고치시니까 또 시기와 질투가 올라왔겠지요.
그 놈의 규례와 규칙을 들먹이면서 예수에게 오히려 죄를 뒤집어씌우려 했습니다.
그런데요 미가서 6:6-8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주님 앞에 나아갈 때에, 높으신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에, 무엇을 가지고 가야 합니까? 번제물로 바칠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가면 됩니까?
수천 마리의 양이나, 수만의 강 줄기를 채울 올리브 기름을 드리면, 주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내 허물을 벗겨 주시기를 빌면서, 내 맏아들이라도 주님께 바쳐야 합니까? 내가 지은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를 빌면서, 이 몸의 열매를 주님께 바쳐야 합니까?
너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새번역)
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철저한 규칙이나 규례를 바탕으로 한 화려한 예배나 엄청난 양의 재물이 아니라 공의, 즉 정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원하시는 정의에 대한 여러 신학자가 연구했는데 그 중
팀 켈러 목사는 정의란 너그러움을 포함한다고 말했고[5]
차준희 목사는 소외된 영혼을 돌아보는 것이 곧 정의라고 말했습니다.[6]
오늘 본문의 이 여인과 같은 자가 소외된 자가 아니면 누가 소외된 영혼이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타난 회당장의 모습에서 이 18년 동안 허리가 굽어 움직이지도 못하던 여인을 향한 어떤 너그러움이나 자비가 느껴지십니까?
진정 하나님께서 원하신다고 하는 정의가 느껴지십니까?
과연 무엇이 중요할까요?
규례를 지키는 것과 소외된 자를 돕는 것 중에서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그 분을 예배한다고 교회에 모이지만 정작 우리 삶에서 소외된 자를 돌아보지 않는다면 죄송하지만 우리의 예배는 허공을 울릴 뿐입니다.
아까 읽으신 이사야 말씀 58:9 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응답하신다는 내용이 있었는데요,
바로 그 앞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을 놓아 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니냐?"
또한 굶주린 사람에게 너의 먹거리를 나누어 주는 것, 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헐벗은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에게 옷을 입혀 주는 것, 너의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햇살처럼 비칠 것이며, 네 상처가 빨리 나을 것이다. 네 의를 드러내실 분이 네 앞에 가실 것이며, 주님의 영광이 네 뒤에서 호위할 것이다.” (사 58:6-8, 새번역)
이 말씀 뒤 9절에 “그 때에” 라고 시작합니다.
소외된 자를 돌볼 그 때에 비로소 하나님께서 응답하신다는 겁니다.
규례도 중요합니다.
예식도 중요하고요.
그러나 그보다 앞서 우리의 삶에서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것은 소외된 자를 돌아보는 수고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교회가 종교의식을 위한 곳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기 위한 곳임을 믿으신다면 더더욱 그러합니다.
그렇기에 회당장의 태도는 규례에 갇혀 정작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을 모른 채 헛된 애만 쓰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 주변에도 이렇게 눌린 자들, 소외된 자들이 있을 거에요.
단순히 경제적 가난으로 인한 고통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 심적으로 억눌린 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 억눌린 자들을 돌아보지 못하고 있다면
어쩌면 18년 동안 허리가 굽어 있던 여인을 바라보는 회당장의 시선처럼 ‘저 사람도 그냥 원래 그랬던 사람이야 내비둬’ 라는 심정이 우리 마음일지 모르지요.
사실, 저도 이렇게 소외된 자를 돌보았는가 자문했을 때 떳떳하지 못함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렇게 말씀을 통하여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돌아보게 하시니 감사하고요,
말 뿐이었던 신앙을 돌아보게 하시니 감사하고요,,
감히 이 자리에서 그렇게 소외된 자를 돌아보자고 말씀드릴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네, 소외된 자를 돌본다는 것은 어려울 수 있어요.
하지만 이 어려운 일은 곧 작은 관심에서 시작하기도 합니다.
주님도 18년 동안 병마와 싸운 여인을 주목하셨잖아요.
이렇게 관심을 갖고 주목하는데 꼭 영적인 분별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고요, 특별한 은사가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소외된 영혼의 아픔과 문제를 주목해 보았을 때 만약 그 영혼을 위해 할 일이 있는데
내가 혼자 할 수 없다면 우리 공동체가 같이 하면 되고요,
우리만의 힘으로라도 벅차다면 전문기관과 같이 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규례나 화려한 예식보다 이것을 더 원하신다는 인식과 정말 그 소외된 자를 돕기 위한 관심과 긍휼의 마음입니다.
그 긍휼의 마음을 통해 소외된 영혼을 돌아볼 때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고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가 더욱 굳건하게 세워질 줄 믿습니다.
[1] https://ko.wikipedia.org/wiki/할라카
[2] https://en.wikipedia.org/wiki/Activities_prohibited_on_Shabbat; http://kccs.pe.kr/jewishcal9.htm
[3]W. Hall Harris III, The Lexham Greek-English Interlinear New Testament: SBL Edition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10), Lk 13:12.
[4]위의 책.
[5] T. Keller, Generous Justice: How God's Grace Makes Us Just (Penguin Publishing Group, 2012), 15.
[6] 차준희, 예언서 바로읽기(차준희 교수의 평신도를 위한 구약특강 4) (성서유니온선교회, 2013), 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