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1216 혐오를 넘어서서 - 눅 7:36-8:3
요즘 사회적으로 큰 이슈 중의 하나가 ‘혐오’에 대한 것입니다.
한 인터넷 사전에서는 혐오를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혐오(嫌惡)는 어떠한 것을 공포, 불결함 따위 때문에 기피하는 감정으로, 그 기피하는 정도가 단순히 가까이 하기 싫어하는 정도가 아닌 감정을 의미한다”[1]
사람들이 혐오를 느끼는 것은 매우 다양해서
특정 정치인이나 지역을 향해 혐오 감정을 드러내는 것에서부터
음식이나 문화, 종교에 이르기까지 혐오 감정을 표출합니다.
이런 혐오 감정들 중에서도 역사적으로 오랜 기간 동안, 그리고 지금까지도 극심한 갈등을 유발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특정 인종이나 성에 대한 혐오입니다.
특별히, 최근 강남역 부근 노래방 화장실에서 일어났던 여성 살해 사건도 ‘여성 혐오’로 일어난 일이라고 하면서
지금까지도 적지 않은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한 신문기사는 여성 혐오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강남순 교수(미 텍사스크리스천대학교 브라이트신학대학원)가 쓴 글에 따르면, '여성 혐오'(misogyny)라는 개념은 다음 두 가지 함의를 담고 있다. 하나는 여성이란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라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여성이 위험한 존재, 즉 남성을 유혹하여 타락하게 만드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이 두 가지 인식이 남성뿐 아니라 여성을 통해서도 비하, 배제, 증오 등으로 나타난다고 한다.”[2]
쉽게 예를 들면, 이런 식입니다.
어떤 여성이 밤에 낯선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했을 때, 그 남성이 잘못했다는 시선보다는 여자가 밤 늦게 야한 옷을 입고 돌아다녔기 때문에 원인을 제공했다는 시선입니다.
마땅히 보호받아야 할 존재가 혐오의 대상이 됩니다.
이렇게 출신이나 직업, 나이에 상관없이 단순히 여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회적인 불평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일은 성경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도 그렇다고 할 수 있는데요,
조금 전에 말씀 드린 여성 혐오에 대한 두 가지 예가 오늘 본문에서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여러분이 보신 바와 같이 예수께서는 지금 한 바리새인의 초청으로 식사를 하고 계셨는데,
한 여인이 느닷없이 나타나 향유를 붓고 예수의 발을 자기의 발로 닦았습니다.
우리가 지난 번 요한복음 12장에서 보았던 이야기와 매우 비슷하지요?
다만 오늘 본문에 나타난 여인과 요한복음 12장의 마리아와 같은 사람으로 볼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요한복음 12장에서는 향유를 붓는 마리아를 향해 가룟유다가 비난의 소리를 높였다면,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를 초청했던 바리새인이 그 날을 세웁니다.
39절을 같이 읽어보실까요?
이 바리새인이 이 여인에 대해 품은 혐오가 느껴지십니까?
비록 속에서 한 말이었지만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이 여인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 말해주지 않습니다만,
어떤 이들은 이 여인은 창녀 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3]
만약 그 추측대로라면
‘이 여자가 누구며’ 라는 말은 이 여자가 창녀이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이라는 말은 평소 그녀가 성적인 죄를 저질러왔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그러니까 아까 여성 혐오의 정의로 보았던,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며, 여성은 남성을 유혹하여 죄에 빠지게 한다는 두 가지 혐오가 이 여인을 향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 바리새인은 예수까지 싸잡아 비난하고 있습니다.
당시 그들의 법에서는 죄인이나 병자를 접했을 때 접한 사람 역시 부정해 진다 하여 접촉 자체를 거부했습니다.
그런데 38절에서 보면
그 여인이 예수 곁에 서서 우는데 얼마나 많이 우는지 그 눈물이 발을 적실 정도였어요.[4]
그리고선 그 눈물로 젖은 예수의 발을 자신의 머리털로 닦고 입맞추고 비싼 향유를 그 발에 부었습니다.
자, 그저 스친 정도가 아니라 이 여인이 아예 머리털로 닦고 입을 맞추었으니 바리새인이 보기에는 예수가 아주 부정하게 되었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래서 39절과 같이 말한 것입니다.
보다 직접적으로 말하면,
‘선지자라는 자가 이런 죄인도 못 알아보고 부정하게 그와 접촉한단 말이야?’
라고 예수를 향해서도 혐오스러운 마음을 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39절에 나온 ‘만일 선지자라면 알았을 것이다’ 라는 표현이 영어 성경에서 보면 ‘If this man were a prophet, he would have known that’ 이라고 쓰였습니다.
이것은 오후 영어 성경공부 시간에 배웠듯이
가정법 과거 완료 라는 문법으로 과거의 사실과 반대되는 것을 가정할 때 사용하는 형식입니다.
즉 ‘만일 그가 선지자였다면’ 이란 말은 그의 마음 속에서는 이미 예수를 선지자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지난 주 말씀 즉, 7:16에서 많은 사람들이 큰 선지자가 우리를 위해 일어나셨다고 말하던 것과는 아주 상반된 반응입니다.
바로 그 때 여인과 예수를 향해 경멸로 가득 찬 이 바리새인의 마음을 예수께서 아셨어요.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그 말씀하시는 내용은 이렇습니다.
500데나리온과 50 데나리온 빚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데나리온이 노동자 하루 품삯이니까요
500 데나리온은 얼마겠습니까?
6,030 원 X 8 시간 X 500일 = 24,120,000
50 데나리온 = 2,412,000
그런데 이 두 사람에게 돈을 빌려준 사람이 이 둘의 빚을 모두 없애준 거에요.
세상말로 완전 땡 잡았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질문을 던지셨어요.
42절을 같이 읽어보실까요?
여러분도 한 번 생각해 보시지요.
2천 4백만원 빚을 탕감받은 사람하고
2백 4십만원 빚 탕감받은 사람하고
둘 중에 누가 더 땡 잡은 겁니까?
그럼 둘 중에 누가 더 자신의 빚을 탕감해 준 사람을 사랑하겠습니까?
당연히 2천 4백 만원 탕감 받은 사람일 것입니다.
바리새인도 그렇게 말했어요.
‘500 데나리온 탕감 받은 자가 더 사랑 할 것입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예수님 말씀하시죠.
44-46절 말씀입니다.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예수님의 말씀은 곧, 이 여인이 자신에게 더 많은 사랑을 표현했다는 겁니다.
마치 더 많은 빚을 탕감 받은 사람처럼 말입니다.
즉, 이 여인이 500 데나리온 빚진 자와 같다면, 이 바리새인은 50 데나리온 빚진 자와 같았던 거죠.
예수께서 정말 이 여인이 누구인지, 그리고 어떤 죄를 지었는지 모르셨을까요?
다 아셨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여인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 보다
그 여인 마음 속에 있는 것을 더 눈 여겨 보셨어요.
바리새인이 보기에는 그 여인이 죄인이었을지 몰라도
정작 그 여인의 그 마음 속에는 자신의 빚을 탕감해 주시는 예수를 향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어요.
반면에, 이 바리새인의 행실은 올 바랐을지 몰라도 그 마음 속에는 빚을 탕감해준 사람에 대한 사랑이 없던 거예요.
자신은 행실이 올바르고 의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의 의를 기준 삼아서 다른 사람을 향해서, 특히 오늘 본문의 이 여인을 향해 혐오의 감정을 유감없이 드러냈습니다.
예수께서 이런 바리새인의 코를 납작하게 만드신 겁니다.
남성중심의 사회, 여성은 천대받던 사회에서
심지어 창녀였던 이 여인마저 용서하시고 받아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눈 여겨 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 끝 8:1-3에 명명된 여제자들입니다.
1절에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복음을 전하셨다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복음의 현장에 함께 있던 여인들이 2-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자기들의 소유를 사용하면서까지 예수의 사역을 함께 했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께서 선포하셨던 하나님의 나라와 그 복음에는 여성들을 향한 경멸과 비난, 혐오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에 따라 하나님의 일을 한다 못한다 구분 짓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동역자로 자신들을 인정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남성이어서, 백성들의 지도자라고 하는 바리새인이어서, 혹은 간음죄를 짓지 않아서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는 자가 아니라
눈물로 예수의 발을 씻기고 자신의 가장 값진 것을 깨어 드릴 수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자이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위해 동역하는 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렇게 예수를 향한 사랑을 표현한 이 여인은 구원을 받습니다.
48절에 보시면 주께서 여인의 죄를 사해주십니다.
여기에서 혹시 물음표를 다실 분이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 아닌가요?
사랑을 표현했다고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나요?
둘 다 맞는 말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께서 자신의 빚을 탕감해 주시는 분,
즉 자신의 모든 죄를 사해주시는 분임을 믿고 그 사랑을 다 표현한 것이지 않습니까?
예수께서는 여인이 행한 사랑의 행동이 그녀의 가슴 깊이 숨쉬고 있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보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50절처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50 데나리온 빚을 탕감 받은 자 입니까
아니면500 데나리온 탕감받은 자 입니까?
47절에 사함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한다는 말씀처럼
예수를 조금 적게 사랑하고
대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데 만족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나의 죄를 예수의 발 앞에 눈물로 쏟아놓으며 사랑을 고백하는,
그래서 예수께로부터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는 말씀으로 인정받길 원하십니까?
그리고 한 가지 더.
우리 안에 예수를 향한 사랑이 가득하다면,
우리는 감히 다른 사람을 혐오할 수 없습니다.
예수를 사랑하면
그의 말씀대로 살게 되고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비판하고 경멸하기 보다
나를 사랑하신 예수의 사랑으로 다른 이들을 사랑하며 살게 됩니다.
나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예수의 그 사랑이 모든 혐오를 뛰어넘어 그 사랑을 살아내게 합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여러분께서
오늘 이야기의 바리새인과 같이 자신보다 약한 자를 혐오하여 비판하고 경멸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자를 품어주는 사랑의 삶을 사시길 원합니다.
그리하여 죄 많던 여인을 용서하시며 평안히 보내셨던 주님의 사랑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도 풍성하게 나타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1] 위키피디아 “혐오” https://ko.wikipedia.org/wiki/%ED%98%90%EC%98%A4
[2] http://m.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03583
[3] http://newsprout.org/bible/bi0107.htm
[4] 성경전서(관주 해설)(Nkgo88ti)(색인)(개역개정판) (대한성서공회, 2009), 눅 7: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