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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516 청년아 일어나라 - 눅 7:11-17


지난 달 28일 서울지하철 2호선 구의역에서 안전문을 수리하던 한 청년이 사고를 당했습니다.

안전문 수리 중 사고는 벌써 세 번째 발생한 사고이고 모두 2호선 역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에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사고였음에도 한 청춘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며 사람들은 분노하고 있습니다.

정치인들도 노동환경개선을 운운하며 사고 현장을 찾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장 가슴 아픈 사람은 그 가족들 아니겠습니까?

그 어머니가 기자회견을 하면서

‘아들을 책임감 있게 키운 것이 후회된다고’[1]라고 말한 기사를 접하고서 저 또한 안타까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가슴 아픈 사고를 당한 가족들에게 주의 위로가 함께 하시길 바라며

제도적 조치가 조속히 이루어져 다시는 동일한 사고가 발생하지 않길 간절히 바랍니다.

너무 무거운 이야기로 시작해서 불편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오늘 우리가 읽고 나눌 복음서의 내용 역시 결코 가볍지는 않습니다.

젊은 청년 하나가 죽었거든요.

본문은 우리에게 그 청년의 나이나 죽은 원인에 대해서는 이야기해주지 않습니다만,

그 청년이 외아들이었고 어머니는 과부였다는 사실에서 그 청년의 죽음이 얼마나 절망적이었는지 말해줍니다.

생각해 보시지요.

과부, 즉 그녀는 남편을 먼저 보냈습니다.

경제 주체였던 남편이 죽음으로 인해 경계적인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고요

남편 없는 멸시와 설움을 견뎌내며 지냈을 겁니다.

이런 저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아이를 잘 길러내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을 겁니다.

이 아이가 먼저 간 남편의 유일한 혈육이며 동시에 자신의 위로이며 희망이었을 테니까요.

그런데 그런 아이가 죽은 거에요.

정말 하늘도 무심하시지…라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얼마나 가슴을 쳤을까요?

얼마나 슬퍼하며 괴로워했을까요?

그렇게 아파하며 장례를 치릅니다.

당시 관습상 사람이 죽으면 그 날 바로 매장했다고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백성들로써 죽은 자를 위한 어떤 종교의식도 치르지 않았고,

시체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부정하다고 율법에서 말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레위기 21, 민수기 19).[2]

그리고 마을 공동체 밖에 매장했어야 했습니다.[3]

그러니까 이 관습대로라면,

오늘 본문에서 이 과부는

아들이 죽은 바로 그 날, 그 아들을 매장하기 위해 성문 밖으로 나오고 있던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누구를 만납니까?

여러 무리와 함께 성으로 들어오고 있던 예수님을 만납니다.

우리가 지난 주에 보았던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셨던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오늘은 그 일이 있은 후 바로 직후 입니다.

당연히 그 일을 직접 본 사람들이 예수의 놀라운 기적에 한껏 고양되어서 시끌벅적 하게 그 뒤를 따라왔을 것입니다.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신 가버나움과 오늘 본문의 나인 성은 약 40km 정도 떨어진 곳인데요,

소문은 금방 퍼졌을 겁니다.

더 많은 사람이 예수 곁으로 몰려들었을 거고요.

나인 성에 들어서는 시각에도 그랬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웅성거리는 무리들과 달리 예수께서는 이 장례를 치르러 가는 무리를 보셨어요.

아들을 잃은 말할 수 없는 슬픔과 괴로움에 얼굴이 일그러져 있는 그 과부를 보셨어요.

성경은 주께서 그 과부를 보실 때 “불쌍히 여기”셨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조사에 의하면, 다른 복음서와 달리 누가복음에서 이런 예수의 감정이 드러난 것은 매우 드문 일이라고 합니다.[4]

그도 그럴 것이 지난 주 이야기만 생각해 봐도요,

백부장이 자신의 사랑하는 종이 죽게 되었다고 여러 사람을 보내었어도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셨다는 표현은 없었거든요.

그런데 오늘은 과부나 장례를 치르러 가는 사람들 중에 그 누구도 이 청년의 죽음에 대해 예수께 말하거나 기적을 바라지 않았습니다만

주께서 이 과부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과부가 왜 슬픔 중에 있는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되지요.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더 이상 울지 말라”

그리고는 젊은 청년을 메고 가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십니다.

그리고 관에 손을 대십니다.

성경은 관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만

들 것 혹은 널빤지 정도를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만큼 시급하게 시체를 처리하려는 것이었겠지요.

왜 그렇다고 했나요?

아까 말씀드린 대로 시체를 부정하게 여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부정하게 여기는 시체에 다가가 주께서 손을 대십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매우 위험한 행동일 수 있습니다.

유대법 상 매우 중요했던 정결법을 어겼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청년아 내가 네가 말하노니 일어나라”

죽은 사람한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대체 누구입니까?

누가 감히 죽어 실려 나가는 사람에게

일어나라 말할 수 있단 말입니까?

놀랍게도 그 명령에 청년이 일어났습니다.

앉아서 말을 합니다.

이에 주께서 그 청년을 어미에게 주었다 말씀합니다.

이 과부의 마음이 얼마나 기뻤을까요?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한 주석은 이 기적의 최대 수혜자는 청년이 아니라 오히려 그 어미인 과부라고 말합니다.[5]

남편도 없이 고생하며 키운 하나 밖에 없던 아들이 죽었을 때,

삶의 희망이요, 기쁨이요, 목표였던 그 아들이 죽었을 때,

이 과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저 슬피 울며 빨리 장사 지내는 수 밖에요.

그런데 갑자기 예수가 나타나 장사 행렬을 멈추더니 자신의 아이를 살려놓았어요.

그 순간이 천국 아니었겠습니까?

모든 절망과 고통과 슬픔과 걱정이 환희와 감사로 바뀌지 않았겠습니까?

주께서 불쌍히 여기셨던 이 과부는 이제 눈물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자, 죽어 실려 나가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자 주변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예수를 따라오던 사람들뿐 아니라 장사를 치르기 위해 나오던 많은 마을 사람들이 다 그 장면을 목격한 거잖아요.

16절 말씀대로 모든 사람이 두려워했습니다.

죽음을 거스르는 신적 권위 앞에 그 누가 태연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말합니다.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이 두 외침이 시사하는 바는 굉장히 큽니다.

백성들은 예수께서 죽었던 청년을, 그것도 과부의 독자를 일으키시는 장면을 보고 엘리야의 기적을 떠 올렸을 것입니다.

아까 구약서에서 우리가 읽었던 그 기적 말입니다.

실제로 이 나인이라는 지역은 엘리야의 기적이 있었던 수넴 이라는 동네와 근접해 있다고 합니다.[6]

지금 이스라엘의 상황은 하나님의 계시가 없고

로마의 식민 통치가 이루어지는 암울한 상황입니다.

그런 가운데 엘리야와 같은 기적 행하는 자를 바로 눈 앞에서 보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즉 자신들을 돌보셨다고 말합니다.

돌보셨다는 표현의 원어를 직역하자면,

돕기 위해 나타나셨다, 돕기 위해 찾아오셨다 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동일한 표현이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가 예언한 장면에서 등장합니다.

누가복음 1:68인데요,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메시아가 그의 백성을 돕기 위해 오신다는 예언적 찬양입니다.

그리고 그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분명하게 실현되었습니다.

죽었던 이 청년과 과부를 둘러싼 이 수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돌보기 위해 오셨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의 기적을 통하여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돌보시며 회복시키신다고 선포하게 된 것입니다.

17절 말씀대로 유대와 온 사방에 그 소문이 퍼져나갑니다.

오늘 함께 보신 이 이야기는 오직 누가복음에만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 나인 이라는 지역 역시 예수의 사역에서 단 한 번 언급될 뿐입니다.

왜 주께서 굳이 가버나움에서 나인까지 가셨을까?

그리고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왜 죽어 실려나가는 청년을 살리셨을까?

저는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뒤에서 저는 그 답을 얻었습니다.

오늘 사건을 목격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찾아와 ‘당신이 정말 메시아 입니까?’ 라고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답하십니다.

22절을 함께 보실까요?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이는 곧 주께서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회당에서 읽으셨던 이사야 선지자의 글 즉,

눅 4:18-19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와 동일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아까 함께 읽으신 시편 146편에서도 동일하게 말씀합니다.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시며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며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

여호와께서 맹인들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들을 사랑하시며

여호와께서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 (6-9).

즉, 주께서는 나인 성에서 죽은 자를 살리시고 과부를 붙드시고

절망과 고통과 슬픔에 갇히고 억눌린 자들을 자유케 하시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돕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몸소 보이셨습니다.

예수 스스로 자기 백성과 함께 하셔서 그들을 돌보시는 임마누엘 하나님 임을 증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죽어가는 백부장의 하인을 그저 백부장의 믿음만을 보시고 고치셨던 주께서

이미 죽어 실려 나가는 자를 그저 그 어미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고치셨습니다

우리가 일일이 다 고하지 않아도

주께서는 이미 우리의 아픔과 고통과 슬픔을 다 아십니다.

친히 지금 나와 함께 하셔서 위로하시고 자유케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우리의 상처 입은 마음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근본적인 능력은 우리의 기도나 찬양과 몸부림이 아니다. 생명을 살리고 절망의 끈을 끊을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은 그 상처를 만지는 예수 자신이다.”[7]

서울신대 윤철원 교수의 말입니다.

이 절망의 시대를 살아가는 자들에게

3포, 4포, 5포를 넘어서 N 포 세대를 살아가는 젊은 이들에게

그리고 우리 스스로에게

선포합시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희망이요 치유자요 생명이십니다 라고 말이죠.

‘청년아 내가 말하노니 일어나라’

주께서 외치셨을 때 죽었던 자가 살아나 다시 그 어미의 품에 안겼던 것처럼,

우리도 이 시대를 향하여 외칩시다.

주께서 말씀하시니

절망의 세대여 일어나라

주께서 말씀하시니

좌절과 우울과 낙망에 빠져 있는 영혼아 일어나라

[1] 한겨레신문 (2016.6.1) http://www.hani.co.kr/arti/society/labor/746157.html

[2] http://www.bskorea.or.kr/bskorea/pr/bibkorea/bibkor_read.aspx?idx=553; 성경전서(관주 해설)(Nkgo88ti)(색인)(개역개정판) (대한성서공회, 2009). 용어해설 상례.

[3] J. Nolland, Luke 1-9:20 (Word Books, 1989), 322.

[4] Biblical Studies Press, The NET Bible First Edition Notes (Biblical Studies Press, 2006), Lk 7:13.

[5] Nolland, 324.

[6] 성경전서(관주 해설)(Nkgo88ti)(색인)(개역개정판), 누가복음 7:11-17.

[7] 윤철원, 누가복음 (부천, 서울신학대학교 출판부, 2014), 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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