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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916 말씀만 하소서 – 눅 7:1-10


세상을 살다 보면 가슴 아픈 일이 많다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아픈 것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큼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일도 없을 겁니다.

부모나 배우자, 혹은 친구가 아픈 것도 안타깝기 그지 없지만

자녀가 아픈 것은 어떻게 말로 표현하기 어렵잖아요.

지난 주 초에 제 아이가 열 기운이 조금 있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수요일 오후에 갑자기 어린이집에서 연락이 온 거예요.

아이가 열이 나니까 데려가라고…

그 날 저녁부터 3일 간을 40도를 오르락 내리락하면서 자지러지는데…

방법이 없습니다.

해열제를 먹이고 항생제를 먹여도 시간이 지나면 어김없이 또 열이 오르는 거에요.

열이 올라서 축 처진 모습을 보는 것도 힘들고

열이 조금 내렸다고 금새 밝아지는 모습을 보자니 또 짠하고

차라리 내가 아팠으면 하는 마음이 얼마나 들었는지 모릅니다.

물론 난치병으로 고생하는 자녀를 둔 부모님들은 그 마음이 오죽할까요?

잠시나마 자녀의 중병으로 인해 무너진 가슴을 간신히 움켜지고 사는 가족들에게 주의 위로가 함께 하시길 바라봅니다.

큰 병이든 작은 병이든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이 아파서 고통 중에 있으면 마음이 참 어렵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런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2절 말씀대로,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다고 합니다.

백부장이란 로마시대 군인 직급 중 하나인데요, 백 명의 부하를 통솔하는 지휘관을 말합니다.

물론,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었습니다.

이 백부장의 업무에 대해 학자들이나 주석가들마다 조금씩 다르게 말합니다만 지배적인 의견은 전투 임무를 수행하는 지휘관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의견입니다.[1]

5절 말씀대로 회당을 짓는다든지

유대 지도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도 그런 추측을 가능하게 합니다.

어쨌든 이런 백부장과 그의 종이 어떤 관계를 형성해왔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이 종은 백부장이 매우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소중히 여기는’, ‘귀하게 여기는’ 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거에요.

그런데 마침 예수의 소문을 듣게 된 겁니다.

무슨 소문을 들었을까요?

멀리 갈 것 없이 누가복음 오늘 본문 앞에서만 찾아본다면,

4:31-37 가버나움에서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 고치셨고 그 소문이 근처 사방에 퍼짐

4:38-41 시몬의 장모를 열병에서 고치심, 그 집에서 온갖 병자들 고치심

5:12-16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시고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셨지만 오히려 소문이 퍼지고 수많은 무리가 몰려움

5:17-26 침상에 들려온 중풍병자를 고치심

6:6-11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심.

이 백부장이 소문을 안 들을래야 안 들을 수가 없었겠지요.

자, 내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바로 내가 사는 그 동네에 모든 병을 고치는 의사가 나타났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열일 제쳐놓고 그 의사한테 가겠지요.

아니나 다를까 같은 이야기를 기록한 마태복음 8장에서는 이 백부장이 예수께 직접 가서 자기 하인을 고쳐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다시 한 번 보시면,

조금 이상합니다.

우선, 백부장 본인이 직접 가서 말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보냅니다.

3절에서는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이 가고요,

6절에서는 벗들, 즉 친구들이 예수께 갑니다.

당장 직접 달려나가

우리 집에 와서 내 사랑하는 종을 고쳐달라고 떼 써도 모자를 판에 다른 사람들만 보내고 있습니다.

이런 이상한 모습은 친구들을 예수께 보냈을 때 더 두드러집니다.

친구들을 통해 뭐라고 말합니까?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어서 오시라고 해도 모자랄 판에 이것은 또 무슨 이야기인가 싶습니다.

예수께서 유대 장로들의 말을 듣고 그 집으로 가고 계셨거든요.

어떤 학자들은 이것이 백부장의 사려 깊은 행동이라고도 말합니다.

이방인이 사는 지역에 유대인이 함부로 들어와 이방인과 접촉했을 때 그 유대인은 곤경에 빠질 수 있었습니다.

유대 문화에 익숙한 백부장은 이것을 알았고 예수가 곤경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자신도 직접 만나지 않고 자신의 집에도 오지 못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2]

하지만 이런 복잡한 문화적인 배경은 제쳐두더라도

이 백부장이 얼마나 겸손한 사람이었는지를,

그래서 그의 겸손함이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하게 했는지 7-8절 말씀에서 보게 됩니다.

7-8절을 같이 읽어볼까요?

그저 말만 해달라는 겁니다.

자신의 수하들이 있으니 그들을 시키면 된다고 합니다.

이 말은 곧 자신이 수하들을 부리듯

예수께서도 자신을 수하로 부리는 것처럼 말만 하면 그대로 하겠다는[3] 놀라운 겸손의 표현 아니겠습니까?

이 말을 듣고 예수님도 놀라셨습니다.

9절을 함께 읽어보실까요?

예수께서는 이 백부장의 언행을 ‘믿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도 이스라엘 누구에게서도 찾지 못한 믿음이라고 칭찬하시면서 말이죠.

이 말은 곧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선택 받은 백성이라고 하는 이스라엘 중 그 누구도 이방인인 백부장만큼 예수에 대한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다.

즉, 이스라엘 혹은 유대인들만 믿음이 있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얼마든지 놀라운 믿음을 소유할 수 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더불어, 예수께서 이 백부장의 말에 놀라며 칭찬하신 이유는 그가 한 말이 단순히 하인의 병을 고치기 위해 감언이설, 즉 예수님 듣기 좋으라고 아부 떨면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 좋게 보이려고 한 말은 더더욱 아닙니다.

말씀만 하사 하인을 낫게 해 달라는 그의 간구에는

거리와 같은 물리적 한계와 상관없이,

민족이나 신분이라는 한계와 상관없이,

예수께서는

말씀 하나로 모든 일을 하실 수 있다는 놀라운 인정과 선포가 담겨 있습니다.

다시 말해, 병의 치유 여부를 넘어서서 예수의 신적 권위를 인정하며 선포한 것입니다.[4]

예수와 깊은 관계를 유지하던 마르다, 마리아 자매도 오빠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당장 예수께서 오셔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예수와 일면식도 없던, 그것도 이방인이요 유대를 식민 통치하는 나라의 장교가

한 낫 별 볼일 없는 갈릴리 시골 출신 선지자에게 완전히 엎드려서 말하는 것입니다.

‘움직이실 것도 없습니다. 말씀만 하시면 내 사랑하는 종이 나을 것입니다.’

다시 봐도 참 대단한 믿음 아닙니까?

그런데요,

놀라운 장면이 뒤이어 등장합니다.

10절을 보실까요?

‘보내었던 사람들,’ 즉 집으로 오시지 말라고 말하러 갔던 친구들이 예수의 칭찬하시는 말을 듣고 백부장에게 그 말을 전달하려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종이 이미 나아 있었습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They found the servant well 이라고 표현합니다.

종이 아주 건강해져 있는 것을 본 겁니다.

분명 그 사람들이 백부장의 말을 예수께 전하려고 집을 떠날 때만 해도 이 종을 다시 못 볼지도 모르겠다 하고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랬던 그 종이 지금 자신들 눈 앞에 아무렇지도 않게 건강한 모습으로 있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혹시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 이 종을 치유한다는 어떤 선포나 선언을 하시는 것을 발견하셨습니까?

예수께서 그 종에 대해 어떤 이야기라도 하셨습니까?

아니면 그 종이 자신의 병을 고쳐달라고 직접적으로 이야기한 부분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오로지 백부장의 의견과 간구만 있었고

예수께서는 그저 백부장의 믿음만을 칭찬하셨을 뿐입니다.

그것도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말이죠.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종이 완전히 치유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우린 여기에서 질문을 한 가지 던지게 됩니다.

‘나의 믿음으로 다른 이의 질병을 고칠 수 있을까?’

물론 병을 고치냐 안 고치냐 문제는 주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럼 이렇게 질문을 바꿔볼 수 있겠지요.

‘주께서 나의 믿음만 보시고 다른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을까?’

답은 ‘그렇다’ 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그렇고요,

서두에 말씀 드렸던 침상에 실려왔던 중풍병자의 이야기가 그렇고요,

야고보서 말씀이 또 그렇습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약 5:14-16).

그렇다면 어떤 믿음, 얼마나 큰 믿음이 있어야 그 믿음을 보시고 내가 기도하는 제목에 응답하시고 다른 사람을 치료해 주실까요?

여기 믿음의 크기를 측정하는 말이 있습니다.

저를 따라 해 보실까요?

‘주여! 말씀만 하소서’

예수께서 칭찬하시고 응답하신 것은 백부장의 사회적 지위를 보고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이나 인간관계를 보고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믿음!

‘말씀만 하소서’ 라던 그의 믿음을 보신 것이었습니다.

주님! 말씀만 하소서! 내가 행하겠나이다!

주님! 말씀만 하소서! 내가 움직이겠나이다!

주님! 말씀만 하소서! 내 생명이라도 드리겠나이다!

이런 결단과 각오가 있다면

이 모습을 주께서 어찌 칭찬하지 않으며

우리의 간구에 응답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다시 한 번 저와 같이 해 보실까요? (위 반복)

이런 겸손한 믿음으로 주 앞에 서는 여러분 되실 때,

백부장의 말이 전달되기 무섭게 백부장의 종이 완전히 회복되었던 것처럼,

여러분이 기도가 주의 귀에 들려

여러분이 중보하는 그 영혼이 회복되고

여러분의 기도제목이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게 될 줄 믿습니다.

[1] Biblical Studies Press, The NET Bible First Edition Notes (Biblical Studies Press, 2006), Lk 7:2.; J. Nolland, Luke 1-9:20 (Word Books, 1989), 318.; 윤철원, 누가복음 (STUP, 2014), 201.

[2] 윤철원; Nolland

[3] 윤철원, 202.

[4] Nolland,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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