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016 사순절, 예수와 한 마음으로 걷는 믿음의 여정6 – 우리는 그를 알아보는가 – 눅 19:28-40
지난 주 우리는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예수의 발에 값비싼 향유를 부은 사건에 대해서 함께 나누었는데요,예수 이름을 가지고 자기 잇속을 챙기려던 가룟 유다의 모습이 아닌,자신의 가장 값진 것을 주께 바치고도 겸손하게 그를 영화롭게 한 마리아의 신앙을 본받자 말씀 드렸습니다. 오늘은 교회 절기상 종려주일 이면서 고난주간의 첫날 입니다.종려주일이라 이름하게 된 것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즉 대추야자나무의 가지와 잎을 흔들며 혹은 예수 앞 길에 놓으면서 환호했다는 데서 비롯되었습니다.그런데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서는 종려나무 가지가 등장하지 않습니다.그리고 예수 곁에서 환호하던 많은 사람들도 보이지 않습니다.그저 그의 제자들이 있을 뿐입니다.분명 같은 사건이지만 다른 복음서와 조금은 다르게 기록된 이유는 무엇일까요?아마 우리에게 종려나무 가지나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아닌 더 집중해서 말하고 싶은 것이 있었겠지요?본문을 다시 한 번 천천히 살펴 보겠습니다.28절에서 ‘이 말씀을 하시고’에서 이 말씀은 본문 앞의 열 므나의 비유를 가리킵니다.이 비유는 우리가 잘 아는 열 달란트의 다른 버전이라고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어떤 사람이 먼 나라에서 왕위를 받아오게 되었습니다.그래서 자리를 비울 때 종 열을 불러 각각 한 므나 씩, 총 열 므나를 나눠줍니다.므나는 약 100 데나리온, 그러니까 노동자 100일 품삯 값어치의 은화입니다.[1]주인이 올 때까지 어떤 이는 이것을 열 배 혹은 다섯 배로 부풀렸지만 어떤 이는 그냥 감췄다가 꺼내놓았습니다.결국 왕이 되어 돌아온 주인이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종과 그가 왕이 되는 것을 싫어하던 백성들을 심판합니다. 이 말씀을 왜 하셨나 하면,세리 삭개오에게 구원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제자들이 오해하였기 때문입니다.19:11을 같이 읽어보실까요?“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더라”그러니까 열 므나의 비유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것을 당장 자신들이 원하는 나라를 이루기 위한 것이라고 착각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아직도 얼떨떨해 하는 제자들을 뒤로 한채 예루살렘으로 앞서서 가십니다.감람산에 다다랐을 때 제자들 중 둘을 보냅니다.아직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를 끌고 오라고 말이죠.이는 곧 구약 스가랴 선지자에 의해 선포된 예언을 이루고자 함이었습니다.“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슥 9:9)구약의 예언뿐만 아니라예수의 예언도 바로 실현됩니다.아무런 사전 허락 없이 나귀를 풀어가는데도 주께서 쓰신다고 하니까 나귀 주인이 바로 허락합니다.이렇게 끌고 온 나귀 위에 제자들은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 예수의 안장을 삼습니다.길에도 옷을 펴서 예수가 나귀를 타고 가는 길을 화려하게 만듭니다.나귀 위에 옷을 얹거나 길에 펴는 것은 매우 큰 의미를 지녔습니다.보통 말을 타고 행진하는 것은 전쟁을 목적으로 할 때이었는데,반면 지금처럼 나귀를 타는 행진하는 것은 평화의 상징으로 인식되었습니다.[2]그리고 옷을 깔고 외치는 행위는 왕을 위한 예우였습니다.열왕기하 9:13에 비슷한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3]“무리가 각각 자기의 옷을 급히 가져다가 섬돌 위 곧 예후의 밑에 깔고 나팔을 불며 이르되 예후는 왕이라 하니라”하나님께서 아합 왕을 심판하기 위해 예후를 왕으로 세우셨는데이 것을 알게 된 주변 사람들이 자신들의 옷을 벗어 예후 밑에 깔고 왕으로 선포한 장면입니다.그러니까 평화를 상징하는 나귀 위에, 그리고 나귀가 가는 길 위에 자신들의 옷을 깔았다는 말은 예수가 평화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선포한 것입니다.실제로 제자들은 그렇게 선포합니다.38절을 함께 읽어보실까요?“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이 표현들이 어딘가 익숙하지 않으십니까?네, 바로 예수께서 탄생하셨을 때 천사들이 목자들 앞에서 예수의 탄생을 알리며 외쳤던 것과 매우 유사합니다 (눅 2:14). 그런데 이런 제자들의 환호에 찬물을 끼얹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39절 말씀처럼, 예수께 제자들을 조용히 시키라고 역정을 냅니다.지난 주에 말씀 드린 대로 나사로의 부활 사건 이후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그런 바리새인들이 봤을 때 제자들이 예수를 평화의 왕이라고 외치면서 행진하는 그 꼴이 보기 좋을 리 없었겠지요.하지만 그 때 예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40절을 같이 보시겠습니다.“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이렇게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십니다.그리고 그 주 금요일에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십니다. 아까 28절에서 예수께서 앞서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셨다는 표현을 기억하십니까?그는 앞서서 죽으러 가셨습니다.모든 사람의 죄값을 대신 치르고자 죽으러 가셨습니다.온 인류에게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주시기 위해 죽으러 가셨습니다.온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 죽으러 가셨습니다. 이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태초부터 있어왔고, 그랬기에 이 예루살렘 입성 역시 그 구원 계획의 한 부분이었습니다.다시 한 번 오늘 본문 전체를 생각해 보시면,마치 잘 짜인 연극처럼 물 흐르듯이 흐르는 것을 보게 됩니다.예수께서 앞서서 가시고제자들은 그 뒤를 따릅니다.어린 나귀 가져오는 것도 아무런 저항 없이 이뤄지고평화의 왕이라고 선포하며 예루살렘으로 들어갑니다.심지어 바리새인들의 비판도 예수와 제자들을 행렬을 막지 못합니다.그리고 그 갈등은 우리에게 자연스레 이야기의 결론을 생각하게 합니다.오늘 이야기의 끝에 투덜대는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예수를 십자가에 매단 자들이 바로 그들이라고 쉽게 추측하게 됩니다.실제로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이 주축이 되어 예수를 빌라도의 손에 넘겨주었고 빌라도는 예수에게 십자가 형을 내립니다.네…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죽였지요. 구약 성경에 예언된 대로 나귀 새끼를 타시고 겸손한 평화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셨건만바리새인들은 시기와 질투에 눈이 어두워 그 평화의 왕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마치 오늘 본문 앞의 열 므나 이야기에서 왕을 거부하며 모략을 피운 자 들처럼 말입니다 19:14을 잠깐 보실까요?이렇게 평화의 왕을 알아보지 못한 바리새인들은 그 왕을 치욕과 저주의 십자가에서 죽도록 내어줍니다. 그런데,평화의 왕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것은 비단 바리새인들뿐이었을까요?다시 말해, 평화의 왕이신 예수를 죽인 것이 바리새인들뿐 이었을까요?제자들이 예수의 십자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에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기 전 긴 예화를 들어 자신이 나중에 왕으로 돌아올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그럼에도 그들은 진정 예수를 자신들의 평화의 왕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동일한 사건을 기록한 요한복음 12장에서 제자들의 이런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려냅니다.“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요 12:14-16)제자들은 자신들이 왜 환호하는지 깊은 뜻은 몰랐던 거예요.예수께서 부활하신 뒤에야 예수께서 왜 나귀를 타셨고 사람들이 그렇게 환호했는지 이유를 알았다는 것입니다.그러니까 오늘 본문의 제자들의 환호는 주께서 여태까지 보이셨던 많은 기적들에 대한 환호였지 성경을 통해 예언되고 실현될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가 없었습니다.그렇기에 그를 배반하고 부인하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는 사람들 틈에 숨어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하고 도망 다녔습니다.예수를 평화의 왕이 아닌 실패한 혁명가 정도로 여기며 부끄러워했습니다.이런 그들의 모습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또 다른 모습이라고 하면 무리일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요?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왜 들어가셨습니까?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입니다.누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까?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입니다.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이 아닌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그의 십자가로 인해 우리는 외적 조건과 상관없이 복음 안에 누구와도 하나가 될 수 있는 평화를 꿈꾸게 되었습니다.골로새서 1:19-22“19.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21.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22.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그렇게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를 여러분의 평화의 왕으로 온전히 믿고 계십니까?혹여 예수의 제자들 중 어떤 이들처럼 예수의 이름으로 세상의 권세나 부를 얻으려 하지는 않았습니까?아니면 말은 평화의 왕으로 모신다 하면서도 예수 이름을 앞세워 바리새인들처럼 비판하는 소리만 높이지는 않았습니까?그도 아니라면 예수의 십자가를 부끄럽게 여기지는 않았습니까? ‘평화의 왕’이 놀라운 이름은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사 9:6) 이번 고난 주간 우리를 위해 나귀를 타고 십자가로 향하신 평화의 왕을 깊이 생각하십시오.나의 세상 권력이나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평화의 왕을 바라보는 눈이 어두워지지 않길,이미 모든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복음 안에 하나되게 하셨건만 내 편견과 고집 때문에 평화의 왕이 지신 십자가를 무색하게 만들지 않길,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옷을 예수님의 나귀 위에 그리고 그 가시는 길 위에 얹어놓을 때 제자들처럼 착각 속에서가 아닌,죽음으로 우리에게 진정한 평화를 허락하신 예수를 참된 왕으로 인정하고 모셔 들이면서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릴 수 있길 간절히 바랍니다.[1] A mina was equal to 100 denarii, making it equivalent to about a hundred times a typical day’s wage. Mark Allan Powell, ed., “Pound,” The HarperCollins Bible Dictionary (Revised and Updated) (New York: HarperCollins, 2011), 824.[2] Henry Chichester Hart, The Animals Mentioned in the Bible (London: The Religious Tract Society, 1888), 24.[3] Paying Jesus kingly homage (compare 2 Kgs 9:13). John D. Barry et al., Faithlife Study Bible (Bellingham, WA: Logos Bible Software, 2012), Lk 19: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