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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116 사순절, 예수와 한 마음으로 걷는 믿음의 여정2-그래도 나는 간다 - 눅13:31-35

우리는 지난 주 사순절 시리즈 첫 번째 시간으로 예수가 이겨내신 시험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생리적인 욕구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채우고

세상 권세와 영광을 바라보기보다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바라보고

믿음과 정체성이 흔들릴지라도 예수가 이 시험을 이겨내시고 끝내 죽음마저 이겨내셨다는 사실을 붙들고 이 믿음의 여정을 함께 걷자고 말씀 드렸습니다.

오늘은 그 두 번째 시간으로 방금 함께 읽으신 누가복음 13:31-35을 통해서 ‘그래도 나는 간다’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본문을 다시 한편 살펴보겠습니다.

지금 예수께서는 갈릴리에 계십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갈릴리를 다스리는 분봉왕 헤롯의 통치 지역에 계십니다.

그 곳에서 사람들을 치유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시면서

복음을 전하고 계셨어요.

그런데 그 때 몇몇의 바리새인들이 다가옵니다.

그리고 예수가 살해 위협을 받고 있다고 말합니다.

31.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이것을 두고 ‘진짜 헤롯이 죽이려 했다,’ 혹은 ‘그저 자기 관할 지역에서 예수가 떠나길 바란 것이다,’ 아니면 ‘바리새인들이 거짓말을 한 것이다’ 등등 여러 가지 의견이 있습니다.

공통적인 것은 헤롯이 예수를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의 반응입니다.

32절에 보시면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어떻게 대답하십니까?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여우는 누구를 말할까요?

헤롯입니다.

보통 우리는 어떤 사람을 여우라고 하나요?

조금 약삭빠르고 총명한 사람들을 약간 비아냥 거리는 말투로 여우, 혹은 ‘불여시’라고 하잖습니까?

반대로 조금 무시하는 듯한 의도도 있었다고 합니다.

굳이 직역하자면, “가서 저 하찮은 자에게 이르되” 라는 말이 되겠지요.

혹은 속이는 자, 파괴하는 자 라는 의도도 있었다고 합니다.[1]

헤롯이 자기 동생의 부인을 빼앗고 이를 지적하는 세례 요한을 참수시킨 사건을 생각한다면 여우라는 호칭이 잘 어울리기도 합니다.

본문의 맥락 상 예수께서 헤롯을 여우라고 부른 것은 무시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32절을 마저 보시면,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오늘과 내일은’은 정확한 날을 지칭한다기보다 다소 관용적인 표현입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것은 다름 아닌 예수께서 평소에 계속 해오시던 사역의 모습입니다.

눅 4:16-21에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인용해 자신의 사역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시는 장면이 그려지는데,

그 선포와 함께 계속 해오시던 사역의 중심에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는 헤롯이 뭐라고 하던 간에 내가 해 오던 대로 사역하겠다 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리고 제삼일에 완전하여진다는 표현은 τελειοῦμαι /teleioumai / I will complete [my work][2] ‘내 일을 끝낼 것’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제삼일에 완전하여진다는 말은 가깝게는 오늘과 내일 할 나의 일, 그 사역을 계속 할 것이라는 말이 됩니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 본다면,

그 말이 예수의 죽음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마지막에 하신 말씀 중 ‘다 이루었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저번에 그 원어를 알려드린 적이 있는데 기억나시나요?

Τετέλεσται /Tetelestai / it is completed [3] (요 19:30)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τελειοῦμαι 와 Τετέλεσται 두 단어 모두 τελος (end) 라는 단어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즉, 지금 다 끝내겠다라는 말과 실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 라는 말을 같은 의미로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신학자의 말처럼, 제삼일에 완전하여지리라는 말씀은, 내가 죽을 거야 라고 말씀하신 겁니다.[4]

제삼일에 나의 일을 끝내겠다 말씀하신 것은 십자가 죽음을 통해 인간의 모든 죄값을 해결하고 자신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성취하겠다는 분명한 선포였습니다.

33절에서 다시 한 번 강력하게 말씀하시는데요,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라니…”

헤롯이 실제로 죽이려고 했다손 치더라도

예수는 자신이 헤롯의 손에 죽지 않을 것을 아셨어요.

왜냐고요?

33절을 마저 보실까요?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 죽는 법이 없느니라”

자신을 선지자에 빗대어 설명하시는 겁니다.

선지자는 반드시 예루살렘 안에서 죽는다는 겁니다.

이해가 되시나요?

선지자라면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요 그 분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인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는, 그리고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그 곳, 예루살렘에서 오히려 선지자가 죽는다니요?

모순처럼 보입니다만,

성경을 통해 이것이 역사적 사실임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여 세우신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셔서 그 들이 잘못된 길로 갈 때마다 돌이키길 바라는 심정으로 그의 말씀을 선지자들에게 들려 보내셨어요.

그러나 돌이키고 회개하기는커녕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온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였습니다.

역대하 24:17-21

“여호야다(제사장)가 죽은 후에 유다 방백들이 와서 왕에게 절하매 왕이 그들의 말을 듣고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겼으므로 그 죄로 말미암아 진노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니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선지자를 보내사 다시 여호와에게로 돌아오게 하려 하시매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경고하였으나 듣지 아니하니라

이에 하나님의 영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감동시키시매 그가 백성 앞에 높이 서서 그들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스스로 형통하지 못하게 하느냐 하셨나니 너희가 여호와를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느니라 하나

무리가 함께 꾀하고 왕의 명령을 따라 그를 여호와의 전 뜰 안에서 돌로 쳐죽였더라”

34절 말씀을 보시지요.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그 뿐만이 아닙니다.

암탉이 새끼를 품듯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부르셨지만 오히려 그들이 원하지 않았다고 예수께서는 고발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35절에서 예루살렘이 황폐해질 것이라는 경고가 뒤따릅니다.

이 심판의 메시지는 뒤에 19:41-44; 21:5-6; 21:20-24 절에서 계속해서 등장합니다.

그리고 서기 70년 실제로 로마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 성이 완전히 무너지고 맙니다.[5]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얘기하시던 주께서 갑자기 왜 예루살렘을 꾸짖으실까요?

어찌 보면 이 꾸짖음은 탄식에 가깝습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의 또 한 미래를 보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무슨 미래입니까?

바로 선지자 중의 선지자이신 예수를 죽이는 사건 말입니다.

33절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 죽는 법이 없느니라”

그리고 이 말씀대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에게 잡혀 십자가형에 넘겨졌습니다.

이 모습을 존 놀랜드 (John Nolland) 라는 주석가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진정 자신들을 지켜주고 보호할 수 있는 그 분을 죽음으로 몰아갔다”[6]

여기에서 질문을 하나 던져볼까 합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을 알고도,

그 사랑하는 예루살렘이 자신을 죽일 것을 알고도,

왜 그 길을 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을까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바리새인들이 전해 준 헤롯의 살해 위협은 대수롭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이 어디에서 죽을 것인지, 그리고 누가 자신을 죽일 것인지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말씀하셨습니다.

33.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말이 좋아 내 갈 길을 간다 하는 것이지

나 죽으러 간다 하는 말이잖아요.

문자 그대로! 죽으러 간다고요.

왜요?

바로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실 뿐만 아니라

예수를 따라 그 길을 함께 걸어갈 수 있도록 본을 보이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그 길,

죽으러 가는 그 길에서 예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고자

자신의 안전과 평안은 내던져 버릴 수 있다는 것이었어요.

자신의 생각 따위는 내던져 버릴 수 있다는 것이었어요.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눅 14:26-27).

예루살렘으로 가는 중 수 많은 무리에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에요.

헤룻이 뭐라고 해도,

예루살렘이 날 죽일 것을 알면서도

나는 이 길을 갈 거야

너희도 나를 따라 이 길을 가자

너희 자신마저도 내 버리고 나와 함께 이 길을 가자

예수님 말씀하시는 거예요.

“사순절, 예수와 한 마음으로 걷는 믿음의 여정”

우리가 지금 함께 나누는 말씀의 주제입니다.

사순절이 그저 우리에게 가식적인 슬픔을 지어내라고 허락하신 절기가 아니지 않습니까?

남들이 하니까 얼떨결에 금식하는 척하는 절기는 더더욱 아니잖습니까?

우리가 이 사순절에 새롭게 발견하고 따라야 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그 분의 발자취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 나는 이 길을 간다 선언하셨던 그 발걸음 말입니다.

단순히 머릿속으로만 담아두는 절기가 아닌,

죽음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았던 예수의 그 발걸음을 함께 걷기로 결단하는 이번 사순절이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1] Luke’s emphasis seems to be on destructiveness, since Herod killed John the Baptist, whom Luke calls “the greatest born of women” (Luke 7:28) and later stands opposed to Jesus (Acts 4:26–28). Biblical Studies Press, The NET Bible First Edition Notes (Biblical Studies Press, 2006), Lk 13:32.

[2]W. Hall Harris III, The Lexham Greek-English Interlinear New Testament: SBL Edition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10), Lk 13:32.

[3]W. Hall Harris III, Jn 19:30.

[4] https://www.deepdyve.com/lp/de-gruyter/the-lucan-christ-and-jerusalem-lk-13-32-t59oOG9kiY

[5] http://www.christianitytoday.com/history/issues/issue-28/ad-70-titus-destroys-jerusalem.html

[6] J. Nolland, Luke 9:21-18:34 (Word Books, 1993), 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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