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1416 사순절, 예수와 한 마음으로 걷는 믿음의 여정 1 – 예수가 이겨내신 시험 - 눅 4:1-13
우리는 지난 주까지 6주에 걸쳐 우리 교회가 표어로 잡은 ‘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는 교회’라는 제목으로 빌립보서 1:27-28 말씀을 통해 복음이 무엇이고 우리 교회가 이 복음을 어떤 자세로 선포하고 살아내야 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교회 절기상 오늘은 사순절의 첫 주일입니다.
사순절 총 6번의 주일 동안 저는 여러분과 “사순절, 예수와 한 마음으로 걷는 믿음의 여정”이라는 큰 제목을 가지고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부활절까지 주일을 제외한 40일의 기간 동안 예수의 고난을 더욱 깊이 생각하는 이 때에,
그리고 특별히 그 첫 주에 우리에게 본문으로 주어진 말씀은 여러분이 방금 읽으신 예수님이 시험 당하신 이야기 입니다.
예수님이 시험 받으신 것과 그의 십자가 고난은 어떤 관계가 있길래 오늘 우리가 이 본문을 마주하고 있을까요?
또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를 던져줄까요?
먼저, 본문을 다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언제 시험을 받으셨습니까?
본문 1-2절에 의하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사십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하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라는 1절의 말씀은 본문 앞의 3:21-22에 등장하는 예수의 세례 이야기를 가리킵니다.
같이 한 번 읽어보실까요?
그렇게 세례를 받으신 후에 성령에 이끌려 40일 동안 금식하고서 그 마지막에 시험이 있었는데 바로 마귀의 유혹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이 때 였을까요?
방금 읽으신 세례 이야기에서 보면 하늘에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성령이 내리는 것과 같이 예수께서 아주 성령에 충만하셨습니다.
그렇게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오셨는데 그 곳에서 40일을 아무것도 드시지 않았어요.
광야가 어떤 곳입니까?
낮과 밤의 기온 차가 심하고
매우 건조해서 물을 얻기가 어렵고 따라서 풍성한 식물을 구하기 어려운 곳입니다.
들짐승의 위험이 있는 곳이에요.
이런 곳에서 40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견딘 사람이 제정신이겠습니까?
제 얘기 해서 죄송합니다만 얼마 전 아침 금식 잠깐 했는데 면역력이 떨어지고 눈에 염증이 생기더라고요.
그런데 40일 금식이라니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계에 부딪힐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에요.
사탄은 지금 이걸 노린 겁니다.
성령충만하셨지만 예수는 또한 사람이셨기 때문에 온갖 유혹으로 시험합니다.
가장 먼저 던졌던 유혹은 기본적인 욕구를 건드린 것이었습니다.
40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은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물어보나마나 음식 입니다.
3절을 보시지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이 놈 보십시오.
생리적인 욕구를 자극하는 동시에 예수의 정체성에 대해 시비를 겁니다.
‘네가 하나님 아들이면 떡 하나 만드는 게 대수냐?’
한편으로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욕구를 채우지 못하는 인생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들겠습니까?
먹을 것 못 먹고, 몸 편히 누워 잘 집이 없고, 잘 빼 입을만한 옷 하나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하지만 사탄은 치밀하게도 이 기본 생리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걸고 넘어져요.
출애굽 할 때의 이스라엘 백성들 모습을 생각해 보실까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의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 기껏 애굽에서 죽을 고생하면서 포로생활하고 있는 백성들 구원해 주셨는데,
열가지 재앙을 보고,
홍해 물이 갈라져 애굽의 군사들과 병거들을 집어 삼키는 것을 눈 앞에서 보았는데,
바로 후에 광야에서 마실 물이 없다고 울부짖어요.
먹을 것이 없다고 원망해요
차라리 이집트에서 고깃국이나 먹고 있을 걸 그랬다고 불평해요.
먹을 것이 없다고 불평하는 그들에게 만나를 내려주셨건만
이번엔 고기가 없다고 투덜대요.
그렇게 투덜대고 불평하는 그들은 결국 40일 길을 40년 동안 헤매다 다 광야에서 죽고 맙니다.
허락된 약속의 땅을 눈 앞에 두고 말이죠.
발람 선지자의 계략에 빠져 이단 신 앞에서 음란한 춤을 추던 이스라엘 백성 이만사천명이 죽은 사건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민 25).
생리적인 욕구에 대한 유혹을 이겨내지 못한 자들의 모습입니다.
반면 같은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지만 예수께서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십니다.
4.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예수께서는 신명기 8:3을 인용해서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셨어요.
우리 신명기 말씀을 같이 한 번 읽어보실까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의 인생은 기본적인 욕구를 채우기 위해 허덕이는 인생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는 인생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본적인 욕구가 채워지지 않는다고 해서 고통으로 여기기 보다 내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하게 살아 움직이지 않음을 더 안타깝게 여기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내 안에서 좌우의 날선 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움직일 때 사탄은 떠나갑니다.
두 번째는 조금 더 고차원적으로 접근합니다.
본문 5-6절 말씀인데요,
천하 만국을 보여주면서 자신에게 절하면 이 모든 권위와 영광을 주겠다고 말합니다.
본문은 제법 그럴싸하게 이 유혹을 그려냅니다.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를 보여줬다는 거에요.
즉, 천하가 자신의 손 안에 있고 마음대로 할 수 있음을 과시하고 있는 거죠.[1]
아니나 다를까, 이 모든 권위와 영광을 자신이 원하는 자에게 줄 것이라고 말해요.
다 자기 것이라고 으스댑니다.
그 보여준 천하만국이 얼마나 화려했을까요..
미국 네바다 주에 라스베가스라는 도시가 생각납니다.
사막 한 가운데 세워진 이 도시는 낮에는 참 한적해 보여요.
그러나 밤만 되면 반짝이는 불빛과 북적 이는 사람들로 거리가 가득 찹니다.
거기에서 흐르는 돈이 한 두 푼이겠습니까?
돈과 환락의 대가로 오가는 권력과 명예의 자리가 한 두 개 이겠습니까?
그것을 다 줄 테니 내게 절해
라고 지금 사탄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곧 총선이 다가오는데 자신의 신앙이나 양심은 개념치 않고 엎드려 절할 사람 많겠죠?
순식간에 펼쳐진 천하 만국의 권위와 영광을 얻기 위해 양심이나 진실 따위는 배설물보다 못한 것으로 여기는 정치인들이 실은 지금도 얼마나 많습니까?
글쎄요, 민감하게 반응하실 분들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차가운 바다에서 꽃다운 아이들 수 백 명이 죽었는데 어느 누구 속 시원하게 책임지거나 진실을 밝히려 하지 않잖아요.
많은 정치인들이 온갖 권모술수로 표만 얻은 후에 그 자리에 앉으면 본인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 탓하고 비방하기 바쁩니다.
그것이 설령 정치의 생태라 할지라도 마치 권력과 명예를 보장받기 위해 영혼을 판 자들의 모습처럼 보이는 것은 저만의 착각일까요?
이 나라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투표하시길 바랍니다.
세상의 권위와 영광은 참 화려해 보입니다.
내 손으로 잡을 수 있을 것 같고 한 번 잡으면 영원할 것 같거든요.
그런데 여러분 그거 아십니까?
세상의 권위와 영광은 절대로 영원할 수 없습니다.
그 권위와 영광은 제한적이며 한계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신랑 되신 예수께서 곧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다시 오실 때에 사탄의 권위와 영광은 모두 무너질 것입니다.
이 땅에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그 나라의 권위가 세워지며 영광의 빛이 비췰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가 엎드려 절하며 섬겨야 할 분은 누구입니까?
여기 예수님의 대답이 있습니다.
8.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영원한 주의 나라, 그리고 그 영광을 소망하며 하나님만 경배하고 섬기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자, 제법 수준 높은 공격도 통하지 않자 이번에는 맹랑하게도 말씀을 인용해서 신적 권위에 도전합니다.
여기에서 사탄이 인용한 말씀은 시편 91:11-12 말씀인데요,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정말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네가 뛰어내렸을 때 하나님이 손수 천사들을 보내서 보호하시지 않겠느냐
하고 도전하고 있는 겁니다.
겉으론 맡는 것 같아요.
언뜻 보기에는 옳은 소리하고 있는 것 같아요.
정말 뛰어 내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말 뛰어 내린다면 큰 일 날 일이죠.
왜냐하면 사탄 마귀는 말씀을 그릇 인용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마치 번지 점프할 때 매는 끈인 것처럼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2]
또한 잘못된 목적으로 말씀을 사용 했습니다.
마치 천사들이 보호해서 예수가 영영 죽지 않을 자 인 것처럼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는 이 땅에 우리를 살리기 위해 죽으러 오신 분인데 지금 사탄은 천사들을 요청해서 죽지 말라고 회유하는 거예요.
왜곡도 이런 왜곡이 또 있을까요?
역시 거짓의 아비답습니다(요 8:44).
이 강력한 도전에 예수께서는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는 말씀으로 응대하십니다.
그리고 마귀는 떠납니다.
본문은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났다고 말씀합니다.
예수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기 위해 다시 돌아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예수께서 받으신 세 가지 유혹에 대해 함께 나누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유혹이고 도전입니다.
생리적인 욕구에 대해,
권력과 명예에 대해,
그리고 신앙과 정체성을 흔드는 도전에 이르기까지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놓치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이 성령충만하면 시험에 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사탄 마귀는 예수께서 가장 성령충만할 때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우리 주 예수께서 그 모든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시험이 찾아오겠지만 성령충만할 때 시험을 이겨낼 힘을 얻게 됩니다.
시험을 이겨낼 지혜를 얻게 되고요,
시험을 이겨낼 담대함을 얻게 됩니다.
예수께서 손수 시험을 당하시면서 우리에게 일러주시고자 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유혹과 도전을 받는 그 순간이 마치 고통과 고난의 시작처럼 다가올 수 있어요.
그러나 동시에 그 유혹과 도전이 찾아왔다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고 있고, 그것을 사탄이 방해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찾아오는 시험을 이겨낸다면 악한 사탄의 공격을 물리치고
우리의 삶에 허락된 하나님의 뜻을 보다 분명하게 이뤄갈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이 모든 시험을 이기시고 성령충만하여 공생애를 시작하셨듯이 말입니다 (4:14).
이렇게 시험을 이기신 주님은 십자가의 저주도 이기시고 우리를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삶에서 순간순간 찾아오는 유혹과 시험들 때문에 곤경에 빠지신 분들이 계시다면 우리의 승리를 위해 손수 시험 받으시고 십자가의 길을 마다하지 않으신 예수를 생각하십시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 4:14-1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 4:6-7)
[1] John Nolland, “Luke 1-9:20,”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35A, (Word Books Press, 1989), 180.
[2] “The original sense is that the Lord’s protection is so near and careful that His angels will not even let people hurt their feet while walking. It does not speak of the angels protecting those who make a show of jumping off buildings.” John D. Barry et al., Faithlife Study Bible (Bellingham, WA: Logos Bible Software, 2012), Mt 4:6; This was not so much an incorrect citation as a use in a wrong context (a misapplication of the passage). Biblical Studies Press, The NET Bible First Edition Notes (Biblical Studies Press, 2006), Lk 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