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215 이 세상이 감당 못할 진리의 왕-요18:33-37
지난 주 우리에게 들려온 소식들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파리에서 벌어진 동시다발적인 테러로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최소 약 130명이 죽었고
최소 약 350명이 다쳤으며 이중에 약 100명이 중태라고 외신은 전합니다.
무고하게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죽음과 아픔에 슬픔을 표합니다.
IS는 이번 총기 난사, 인질, 폭탄테러가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밝혔습니다.
이에 프랑스는 전폭기로 IS가 점령한 지역을 폭격하였습니다.
프랑스가 IS와의 전쟁을 선포했지만 IS는 이에 굴하지 않고 미국 본토에서 테러를 저지르겠다고 영상을 찍어서 돌리고 있습니다.
조금 성격은 다릅니다만 우리 나라도 그리 조용하지는 않았습니다.
광화문에서 벌어졌던 시위에서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이 있었고 이 과정에서 인명피해도 벌어졌습니다.
제가 지금 시위 내용의 옳고 그름이나 국정화 사태에 대한 옳고 그름을 따지려는 것은 아닙니다만
소중한 생명이 위태롭게 되었다는 것에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왜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렇게 혼란과 혼돈을 거듭할까요?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다 자신들이 믿는 것이 진짜 진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IS 보십시오.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잔혹함으로 사람들을 죽이고 문화재를 파괴하고 있지만 그들은 오히려 당당합니다.
자신들이 믿는 진리만이 최고라고 여기고 여기에 반하는 모든 것은 파괴하려고 합니다.
이번 국정화 사태는 어떤가요?
국정화를 찬성하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모두 일리가 있습니다.
게다가 양쪽 모두 자신들의 주장이 진짜라고 말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유혈사태까지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심각한 것은 이 진리라고 믿는 것에 신앙 혹은 종교의 힘까지 더해진다면 어떤 일을 도모하는데 있어 아주 강력한 촉매가 됩니다.
IS 가 그럴테고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건 역시 그런 부류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총독 빌라도에게 심문 받으시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진리 수호라는 목적에 종교의 힘이 더해졌을 때 한 사람의 목숨이 얼마나 부질없이 희생될 수 있는가를 절실히 보여준 사건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구원의 길이기에 주께서 그 길을 피하지 않으시고 기꺼이 죽임을 당하셨지만
이스라엘 사람들만 놓고 본다면 스스로의 혹은 종교지도자들의 잘못된 주장을 참 진리로 믿고 종교의 힘을 빌어 합법적으로 무고한 살인을 저지른 사건입니다.
빌라도의 시선을 통해서 보았을 때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의 주장이 얼마나 억지스러웠으면
빌라도가 예수를 심문하다 말고 나와서 군중에게 묻습니다.
오늘 본문 위의 29절입니다.
“그러므로 빌라도가 밖으로 나가서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발하느냐”
이리저리 뜯어봐도 도저히 예수를 사형에 처할만한 죄를 찾지 못했거든요.
그 때 사람들이 이야기합니다.
‘행악자가 아니면 끌고 오지도 않았습니다.’
유대 법으로 처리하라는 말에 죽일 권한이 없어서 데려왔다고 이야기합니다.
당시 유대는 로마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것은 로마 정부의 허가가 있어야 했던 모양입니다.
상황이 이러니 빌라도도 다시 심문하려고 예수에게 돌아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그러나 예수님 말씀하시죠.
36.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달리 말하자면, 나는 유대인만의 왕이 아니다 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잘 이해가 안 됩니다.
그래서 또 묻습니다.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37절에서 예수님 대답은 이렇습니다.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오늘 본문에는 포함되지 않습니다만 38절에 빌라도의 물음이 나옵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이 진리가 무엇일까요?
예수께서는 왕이 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는데 이 왕이 되는 것이 곧 진리에 대해 증언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진리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 진리는 어디에서 왔을까?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이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이 땅에 왕으로 오셨다고 했지만 정작 이 세상 왕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땅에 오셨으되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그 분이 전하는 진리 역시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 어디에서 왔겠습니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 진리는 이 세상에서 난 것이 아니요
하늘 아버지로부터 난 것입니다.
이 진리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영원하신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이 진리를 전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노라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네, 예수께서 이 진리를 증언하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이 진리를 전하는 분이신 동시에
은혜와 진리 그 자체이십니다.
14:6절에서 그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참 빛이요 참 포도나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1]
그렇다면 37절 끝에 말씀하신 이 진리에 속한 자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자들
그 권위에 순종하는 자들
그 말씀을 사랑하며 지켜 행하는 자들 입니다.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그 분의 왕권을 바라보며 함께 통치할 것을 꿈꾸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가 지금 서 계신 곳은 어디입니까?
로마 총독의 심판장입니다.
누가 그를 여기로 끌고 왔습니까?
왕이 되어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오신 그 분을 누가 왜 여기로 끌고 왔습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진리의 속한 자들이 그를 끌고 왔을까요?
물론 아닙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한 반역 무리의 우두머리로 보았어요.
네, 어찌 보면 왕으로 보긴 봤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이 섬겨야 할 왕으로 생각하지 못했어요.
자신들이 따라야 할 왕으로 여기지 않았어요.
글쎄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명을 먹이셨을 때 좋아했을지 모릅니다.
많은 병자들을 일으키고 귀신들을 내 쫓을 때는 좋아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자신들의 필요를 채우는 사람일 때 얘기였어요.
구름같이 허다하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라다녔지만 지금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지금은 흉악범이라고 손가락질하며 십자가에 매달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왕이라고 생각했다면 절대 이럴 수 없습니다.
분명 그들도 예수께서 전하는 진리를 들었을 테지만
그 진리를 이 세상 잣대에 비추어 받아들이려고 하니까 말이 안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결국 예수께서 전한 진리보다는 유대종교지도자들의 주장이 더 설득력 있게 들렸고
그들의 주장대로 예수를 십자가로 내모는 흡사 폭도들의 모습이 되었다는 거지요.
그렇다면 지금 예수를 심문하고 있는 빌라도는 어떻습니까?
그는 진리에 속한 사람이었습니까?
오늘 본문 33절에서 빌라도는 예수에게 묻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이 질문을 들은 예수께서 빌라도가 진리에 속한 자인지 아닌지를 시험해 보십니다.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하는 말이냐”
우리는 이 구절에서 가이사랴 빌립보 라는 지역에서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물으셨던 질문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하느냐’
엘리야, 더러는 세례요한이 살아났다고 합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베드로가 정답을 말했습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베드로의 답과는 달리 뚱하게 받아칩니다.
“내가 유대인이냐”
즉, 예수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건 아니건 나와 무슨 상관인가 라고 선을 긋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말투로
‘뭘 그렇게 잘못해서 유대인의 왕이라는 자가 유대 백성들과 대제사장들의 손에 끌려 여기까지 왔느냐’
묻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 빌라도도 어디에서 진리가 왔고 이 진리를 증언하시는 분이 누구이신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도 예수를 이 세상의 또 다른 왕으로 치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말씀하시죠.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 세상의 권세와 정치에만 온 신경이 쏠려 있는 로마 총독에게 예수의 말은 너무 어렵기만 합니다.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결국 빌라도는 진리를 듣지 못합니다.
그저 그를 고소한 유대인들의 비유를 맞추고 대충 이 죄 없어 보이는 사내를 내보낼 생각만 합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만왕의 왕이 바로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왜 왔는지 말씀하고 계시지만
그 음성을 알아채지 못하고 진리로 돌아서지 못합니다.
그는 진리에 속한 자가 되지 못했고
그 왕을,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왕을
세상의 법으로 사형에
그것도 가장 수치로 여기는 십자가 형에 내어준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빌라도와 그 악행을 예배 때마다 사도신경을 통해 고발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빌라도나 결국 이 세상 안에서 세상 논리로만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세상을 넘어서는 왕의 진리를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는 십자가 처형이었고요.
서두에 말씀 드린 대로,
진리와 가치관이 혼란스러운 세상입니다.
이 세상의 기준과 잣대로는 바로 설 수 없는 세상입니다.
내 믿는 진리가 진짜다 라고 부르짖는 여러 사람의 싸움이
도긴개긴이고 그 밥에 그 나물일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빛이 오면 어둠이 물러나는 것처럼
정말 진짜가 나타나면 자기들끼리 물고 뜯던 논리들은 다 목소리를 낮추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저는 지금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의 모든 이성과 논리에서 도피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세상을 바라볼 때 우리 안에 흔들리지 않는 정말 참되다고 하는 진리가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거예요.
감히 세상이 담지 못하는 크고 옳은 진리가 우리 안에서 중심을 잡을 때 우리가 세상을 대하고 바라보는 자세도 분명 달라질 것이라는 거예요.
진리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주장하실 때
세상의 부조리한 논리나 사상에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왕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세상을 변화시켜 나간다는 겁니다.
구원하러 온 대상들인 백성들의 손에 이끌려 십자가를 지러 간 그 순간에도
빌라도를 향하여 자신이 진리의 선포자임을, 그리고 진리의 왕임을 말씀하시며 참 길을 보이고자 하셨던 그 주님,
그 주님을 정말 여러분의 왕으로 받아들이신다면
여러분 또한 그 분의 백성으로 이 세상을 뛰어넘는 진리에 속한 자가 되는 겁니다.
그 분의 음성을 듣고 세상에서 그 진리를 외치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다시 살아나셔서 만왕의 왕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왕으로 모셔들이십시오.
이 세상이 감당 못할 진리의 왕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며 그분께 속하기로 결단하십시오.
참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귀한 이름이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1] Joanna Dewey and Mark Allan Powell, “Truth,” ed. Mark Allan Powell, The HarperCollins Bible Dictionary (Revised and Updated) (New York: HarperCollins, 2011), 1073.